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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의 考古野談

한겨울 한밤중에 맨손으로 건진 백제금동대향로

  •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문화재 전문언론인

한겨울 한밤중에 맨손으로 건진 백제금동대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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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에서 출현한 백제

시굴조사를 토대로 하는 첫 발굴조사가 마침내 닻을 올렸다. 사역 전체에 대한 추후 발굴조사가 대략 완료되면서 밝혀졌지만, 첫 발굴 대상지는 사찰 중심에 해당하는 탑과 금당(金堂)이 있는 구역 양쪽을 담장처럼 막아선 복도형 건물인 회랑(回廊) 중 서쪽 회랑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때 조사 구역을 서회랑지(西回廊址)라고 한다.

조사는 충청남도와 체결한 학술조사 용역에 따라 국립부여박물관이 맡았다. 투입 조사비는 2800만 원. 조사기간은 10월 26일부터 같은 해 12월 24일까지 대략 2개월이었다. 계절로 보면 늦가을에서 한겨울에 걸치는 시기인 데다 혹한기가 포함된 까닭은 긴급히 발굴 예산이 책정되고, 그것을 연말까지 소진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당시 물가 수준을 고려한대도 3000만 원도 되지 않아 턱없이 부족한 조사비다. 당시 부여박물관장이자 조사단장인 신광섭 현 울산박물관장의 말.

“그 예산은 나중에 초대 문화재청장이 될 노태섭 당시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장이 지원한 겁니다. 과장 전결 예산 지원 한도가 아마 3000만 원이었을 거예요. ‘금동대향로 발굴은 내가 지원해서 된 거다’는 말을 그분이 지금도 하는데, 이때 향로를 찾았어요.”
향로가 발견되고 수습된 시점은 12월 12일 한밤중. 조사 내력을 더 파고들면, 이상한 점이 더 있다. 조사 종료 시점이 성탄절 이브인 12월 24일이라 하지만, 문화재관리국이 허가한 조사 종료 시점은 12월 5일이었다. 더구나 실제 조사한 발굴 면적도 정확한 수치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당초 허가받은 면적보다 훨씬 넓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다시 신 관장의 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 같으면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제가 고발당할 일이었어요. 허가받은 기간을 넘기면서 조사했고, 허가받지 않은 지역까지 발굴했으니까요. 그 예산으로는 시굴조사밖에 못해요. 무리해서 조사했지요. 그러다가 금동대향로를 찾았어요. 그 반향이 워낙 컸으니, 이런 일들은 다 조용히 지나갔고, 더구나 이후 능산리 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연간 발굴조사비가 1억 원 넘게 지원됐어요.”

그러고 보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어쩌면 배짱 발굴이 준 선물인 셈이다. 어떻든 이때 조사 결과 백제 시대 건물지로는 나중에 공방지(工房址)Ⅰ이라 일컫게 되는 제3 건물지와 서회랑지 일부인 제2 건물지, 그리고 서회랑지 바깥 소형 건물지인 제1 건물지의 3개 동이 확인됐다. 문제의 금동대향로는 이 중에서 공방지Ⅰ에서 드러났다. 이곳 유물 출토 양상이나 바닥면 상태로 볼 때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던 공간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조사단은 공방지로 본 것이다.



공방지는 건물 전면이 동쪽을 바라보는 동향(東向). 규모는 남북 길이 18.12m에 동서 폭 11.18m였다. 나아가 이곳은 대략 같은 크기의 3칸 방으로 구획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위치에 따라 이들 방은 남실(南室)·중앙실(中央室)·북실(北室)로 명명했다. 이들 중 중앙실 내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덩이 흔적 두 곳이 드러났다. 한 구덩이는 남북 길이 72㎝, 동서 너비 48㎝, 깊이 10㎝의 타원형으로, 그 안에서는 제비 꼬리 모양 풍경판과 당초(唐草)무늬를 그린 채색 칠기 파편이 수습됐다.



한겨울 한밤중에 맨손으로 건진 백제금동대향로

대항로가 발굴된 능산리 절터 지도.[부여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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