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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윗분’ 의중 꿰뚫는 ‘준비’의 達人차관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 글:현승윤 hyunsy@hankyung.com

‘윗분’ 의중 꿰뚫는 ‘준비’의 達人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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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부총리는 노대통령이 장관 인선 작업에 착수한 이후 끊임없이 이런저런 하마평에 올랐다.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 청와대 정책실장,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 등으로 거명된 것. 그러자 상당수 인수위원들은 “김진표가 경제부총리가 되면 경제개혁이 끝난다” “노대통령이 관료의 덫에 빠지면 안 된다”며 여러 경로를 통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정권 창출을 위해 한 배를 탔던 인수위원들의 정서적 거부감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은 새 정부의 첫 경제팀 수장으로 김진표를 선택했다. 김부총리에 대한 노대통령의 신임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 배경은 몇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다. 노대통령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재경부 세제실장이던 김부총리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 김부총리가 노대통령에게 ‘똑똑하다’는 인상을 심어준 것은 분명하다. 세법에 정통한 변호사 출신인 노대통령이 세법 전문가인 김부총리와 교감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노대통령은 한번 믿음을 준 사람에 대한 신뢰가 두텁다고 하지만, 인수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경제부총리로 전격 발탁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한 인사는 “노대통령이 자신의 얘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으로 김부총리를 꼽았다”고 말했다. 인수위 활동 과정에서 김부총리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지만, 정작 노대통령이 경제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뜻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고 본 사람은 인수위원들이 아니라 김부총리였다는 얘기다.



김부총리가 취임 직후 “세금 감면과 비과세 조항을 줄이고, 법인세율을 단계적으로 인하하겠다”고 발표하자 청와대 비서실의 일부 관계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법인세율을 낮추면 조세 형평성을 후퇴시킬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노대통령은 3월10일 재경부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일부에서 오해하듯이 대통령이 법인세 인하 방안을 제지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김부총리의 ‘판정승’이었다.

김부총리는 ‘윗분’의 의중을 정확히 읽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이는 타고난 재능이라기보다는 위에서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를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는 성실성, 자신의 코드(code)를 윗선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자세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다.

그래서인지 그는 상사로부터는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지만, 밑으로부터는 “‘미리 준비하라’는 지시 때문에 일이 끊이지 않는다”는 불평이 나올 만큼 ‘모시기 힘든 상사’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92층 걸어오르기와 禁酒 결심

김부총리가 재무부 사무관으로 일하던 1970년대 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재무부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민속주 공급 확대 방안을 내일 아침까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깜짝 놀란 차관은 담당 국장을 찾았고, 담당 국장은 다시 담당 과장을 찾았지만 과장은 이미 퇴근해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진표 사무관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하던 국장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정을 듣고 난 김사무관은 “마침 민속주에 관해 만들어놓은 자료가 하나 있다”며 보고서를 내놓았다. 덕분에 아무 탈없이 보고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1993년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의 뒤에도 김부총리가 있었다. 그때 김부총리는 세제심의관이었는데, 홍재형 당시 재무부 장관이 일요일마다 그를 만나 의견을 들었을 만큼 준비상태가 완벽에 가까웠다. 그는 1982년 제정된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과 외국의 사례,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할 경우 예상되는 문제점 등에 대해 꼼꼼한 검토를 끝낸 터라 실명제에 관한 한 어떤 질문에도 답변할 태세가 돼 있었다고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마련한 금융실명제 방안을 현실에 맞게 뜯어고치고 보안을 유지하면서 짧은 시간에 준비 작업을 마칠 수 있었던 데는 김부총리의 역할이 매우 컸다.

김부총리는 상사와 보조를 잘 맞추기로도 유명하다. 1996년 9월 한승수 당시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이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평소 등산을 좋아하는 한부총리가 세계 최고 높이의 92층짜리 ‘페트로나스’ 빌딩 옥상까지 걸어서 올라가겠다고 하자 김진표 비서실장도 기꺼이 따라 나서 ‘등정’에 성공했다. 92층 건물 꼭대기까지 따라올라간 그의 체력도 체력이지만, 상사와 보조를 함께하려는 태도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게 당시 재경원 관료의 얘기다.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이 국무총리 지명자로 내정되자 당시 국무조정실장이던 김부총리는 그토록 좋아했던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여러 부처의 업무를 조정하는 업무가 워낙 과중하다 보니 건강을 위해 술을 자제할 필요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여성 국무총리를 제대로 모시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상 총리지명자에 대한 국회 인준이 부결되자 그의 금주(禁酒) 결심도 흐지부지됐지만, 윗분을 확실하게 모시려는 자세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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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현승윤 hyuns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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