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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록백꾸’ 몇 판 쳐드려야 “그만 나가 놀아라”|조영남

  • 글: 조영남 가수

‘록백꾸’ 몇 판 쳐드려야 “그만 나가 놀아라”|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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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인가. 또 있다. 시골엔 닷새마다 장이 서는데 장에 가면 반드시 식구마다 하나씩 양잿물덩어리를 사와야 했다. 빨래를 삶을 때 꼭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양잿물이 꼭 부서진 차돌멩이처럼 생겼다. 우리의 두목님은 해가 서산에 지는 파장녘이 되면 ‘꼬붕’들에게 돌멩이를 주워오게 했다. 그리고는 그걸 양잿물덩어리처럼 깨서 갱지로 포장까지 하고 지푸라기 한 가닥으로 질끈 묶어 진짜와 똑같이 만든 다음 길 위에 드문드문 흘려놓도록 시켰다. 그러면 장에 갔다 오는 사람들이 ‘이게 웬떡이냐’ 하고 슬금슬금 집어 가는 것이었다.

어릴 적 내 아버지에 관한 단편적인 기억들은 여기서 끊긴다.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간다. 달걀 한 꾸러미를 훔쳐서 도망친 놈을 장마당까지 따라갔다가 쓰러졌는데, 그 자리에서 완전 반신불수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원망하랴 하늘을 원망하랴. 이렇게 전반부 이야기는 그런대로 익사이팅했다. 그러나 이후 후반부의 얘기는 단출하기 그지없다. 한 자세로 쭉 간다. 죽는 날까지 말이다. 한도 끝도 없이 안방 아랫목이나 마루 위 혹은 앞마당 가마니때기 위에 누워 계시거나 쭈그리고 앉아 계신 모습.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우리집에는 가난이 태풍처럼 몰아쳤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그냥저냥 집에서 뭉그적거릴 수가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는 달랐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집에 더 이상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난을 피해서 큰누님과 형이 먼저 가 계신 서울로 밀려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혈혈단신 서울 가는 기차에 올라탔고 그 후 누나가 세들어사는 집에 얹혀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시골 깡촌놈에서 하루아침에 일약 도시소년으로 변한 것은 분명 피치못할 사정으로 그리된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전화위복이었다. 깡촌놈에서 서울 유학생(?)으로 신분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면 서울에서 왔다는 것이 여학생 사이에서 여간 큰 화제가 아니었다.

삽교면 두리2구 642번지



서울 생활은 물론 고생이 막심했다. 그때는 누구나 다 고생할 때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고생이라고 느낄 줄 몰랐다. 따라서 나는 단 한번도 나를 고생하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다. 나는 그냥 서울에서 묵묵히 고등학교에 다녔다. 아쉬울 것도 없었다. 시골에 두고 온 병든 아버지나 아무 대책 없이 아버지 똥오줌을 손수 갈며 시중을 드는 어머니, 또는 혼자 남아 있는 내 동생 영수를 안타깝게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사는 게 내 팔자려니 했다. 나는 선천적인 낙천주의자였다. 다만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나를 너무나 들뜨게 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거나 식구들이 보고 싶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시골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다. 서울에서 대학까지 다니는 동안 최고의 기쁨은 방학 때 기차 타고 시골에 내려가는 것이었다.

나는 요즘도 명절 때 사람들이 시골 내려가는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서울역 광장에 구름처럼 모여 있는 광경을 TV같은 데서 보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건 결코 남 얘기가 아니었다. 그 옛날 나도 그런 인파에 섞여 있었다. 충청도 삽다리 정거장까지 가는 기차표를 손에 넣었을 때는, 아! 그때 나는 정말 세상을 정복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한테도 정말 더럽게 가난할 때가 있었다. 시골 가는 3등열차에 올라타면 나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무조건 난간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대여섯 시간을 그대로 갔다.

온종일 석탄먼지 같은 걸 뒤집어쓰고 거지 깍정이 같은 몰골로 삽다리역에 내려 낯익은 면사무소 앞 동네 장터 초등학교 옆에 붙어 있던 ‘충남 예산군 삽교면 두리2구 642번지 조승초씨’댁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면 앞마당 가마니때기 위에, 겨울이면 안방 남루한 이불 위에 쭈그리고 앉아 계시거나 드러누워 계시거나 늘 똑같은 장면이었다.

내가 느닷없이 아버지 앞에 나타나면 아버지는 금방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파리하던 얼굴빛이 순식간에 빨간색으로 변할 때는 ‘저러다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아버지는 불편한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빨개진 얼굴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하셨다. 그 흔한 대사, 말하자면 “아버지 그 동안 별고 없으셨어요?”라든가 “아들아 고생 많았지”라든가, 뭐 이런 따위의 대사가 일절 없었다. 어머니는 옆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콧물만 훔치셨다.

대사가 삭제되었거나 몰수된 가족상봉에서 단지 아버지의 얼굴 빛깔만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건 나를 좋아했거나 사랑했다는 걸 훌쩍 넘어 당시 아버지의 유일한 기쁨이 서울서 내려오는 넷째아들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는 뚜렷한 증거다.

안방의 오줌 썩는 냄새

아무 말도 없이 마주보고 있는 게 괜히 서먹해서 나는 얼른 “아버지, 나 준묵이네 다녀올께” 하고 한마디 던지고 휑하니 친구네로 달려가곤 했다. 그때는 이메일도 휴대전화도 없는 총체적 교통두절의 시대라 그저 얼굴을 들이밀고 ‘나 왔다’ 하면서 나타나면 ‘너 왔냐? 은제 왔냐?’ 하고 반기는 게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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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영남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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