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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의 심心중中일一언言

한국 교회가 망각한 루터의 세 가지 메시지 ‘질문하라, 저항하라, 소통하라’

종교개혁 500주년, ‘루터의 재발견’ 펴낸 최주훈 목사

  •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한국 교회가 망각한 루터의 세 가지 메시지 ‘질문하라, 저항하라, 소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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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517년인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6하 원칙에 입각해 풀어봤으면 합니다. 제일 먼저 ‘언제’에 대한 질문입니다. 종교개혁 기점을 1517년 10월 31일로 보는 이유는 뭔가요.
“루터가 라틴어로 쓴 ‘95개조 논제’를 게재한 사건 때문이죠. 핵심은 역시 면죄부에 대한 비판입니다. 당시 진행 중이던 로마의 바티칸 성당 건축자금과 종교기득권자들의 빚을 갚기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도 이를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종교 기득권자들의 권위가 막강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단독으로 반기를 든 겁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며 돈으로 양심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종교적 구원을 거래할 수 없다는 것이죠. 라틴어로 된 글이라 처음엔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독일 내 면죄부 판매 총책이던 알브레히트 대주교가 그해 12월 로마교황청에게 이를 보고하면서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그리고 3년여 뒤인 1521년 1월 루터를 파문한다는 교황 레오 10세의 교서가 발표되면서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란 의미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으로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이 가져온 ‘지성의 타락’이 ‘교회의 부패’를 낳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중세의 전성기는 스콜라 철학이 꽃피운 13세기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사제 계급은 이를 이끈 최고의 엘리트였죠. 1347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신의 저주’로 불린 전염병이었는데, 모든 시신의 수습을 사제들이 하다 보니 희생이 컸습니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라틴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마구잡이로 사제로 만든 거죠. 교회 안에 사유의 능력이 사라지고, 대신 돈과 권력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겁니다. 그 결과 가톨릭 역사에서 최악의 암흑기로 불리는 ‘르네상스 교황기’(1440~1520) 80년이 시작됩니다. 돈이면 주교도 되고, 교황도 될 수 있는 때였죠. 일례로 루터를 파문한 교황 레오10세는 13세 때 주교가 됐습니다. 유럽 최고의 상인 가문인 메디치 가문 출신이어서 돈으로 성직을 산 거죠.”

신대륙의 발견, 인문주의의 발흥,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대륙의 발견은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런 질문에 응답할 능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지요. 교회를 대신해 그 질문에 응답하려고 등장한 게 인문주의입니다.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라는 그 구호 속의 원천은 사실 성서를 뜻합니다. 라틴어 성경 이전 헬라어(고대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응답할 능력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 같은 인문주의자의 한계는 라틴어로 자신들끼리만 소통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사회에서 라틴어 문맹률이 95% 이상이었습니다. 루터는 달랐습니다. 지성인들에겐 라틴어로 신학과 철학을 논하고, 민중에겐 시장통에서 쓰이는 쉬운 독일어로 교회의 부패상에 대해 맹공을 퍼부으며 이런 문제의식을 확산시켜 종교개혁의 물꼬를 트게 한 겁니다.”



왜 비텐베르크인가

한국 교회가 망각한 루터의 세 가지 메시지 ‘질문하라, 저항하라, 소통하라’
다음은 ‘어디서’에 대한 질문입니다. 왜 그 장소가 독일의 변방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였을까요.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많이 떨어진 남서부 소도시던데….
“동서를 도보로 횡단하는 데 15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작습니다. 원래 이곳은 작센공국에서도 무명에 가까운 시골이었습니다. 그러다 15세기 말 작센공국이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 같은 대도시 중심의 부유한 서부 지역과 비텐베르크 중심의 미개발 동부 지역 둘로 나뉩니다. 이때 비텐베르크 지역을 물려받는 대신 황제 선출권을 지닌 ‘선제후’의 직함을 택한 게 프리드리히 3세입니다. 야심가였던 그가 깡촌 개발을 위해 처음 한 일이 대학을 세운 거였습니다. 1502년 비텐베르크 대학을 세워 유럽의 우수한 인재를 대거 영입했죠. 당시 비텐베르크의 주민 숫자가 2300명이었는데 학생 숫자는 1600명이나 됐습니다. 당시 독일 최고 대학이던 쾰른 대학 학생수(300명)의 다섯 배가 넘었습니다. 루터는 1512년 여기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임용됐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럽 최대 지식인 그룹의 지지를 등에 업을 수 있었던 거죠. 비텐베르크 성채교회가 바로 이 대학 채플(예배당)이었습니다. 또 이곳에 모인 수재들이 북유럽과 덴마크, 스위스,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면서 종교개혁의 확산을 낳게 된 겁니다.”



종교개혁 성공에는 프리드리히 3세와 이를 계승한 작센선제후들의 보호와 후원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루터를 후원한 진짜 이유는 뭘까요.
“루터를 후원한 작센선제후는 3명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프리드리히 3세(1463~1525)와 동생 요한(1448~1532) 그리고 요한의 아들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1503~1554)입니다.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지원한 이면엔 장삿속이 숨어 있습니다. 그는 2만여 점의 성물을 수집했는데 가톨릭 축일마다 이를 전시하면서 돈을 챙겼습니다. 그런데 로마교황청에서 면죄부 직판에 나서는 바람에 장사가 안 되자 면죄부를 맹비판한 루터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겁니다. 그래서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의회)에서 루터에게 최후의 항변 기회도 마련해주고 루터가 교황청에서 파문당하고 신성로마제국에서 추방령을 받자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城)에 숨겨주고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돕습니다. 처음엔 이런 정치경제적 이유로 지원했지만 점차 루터에게 감화돼 진심으로 그를 보호하고 지원하게 됐고 동생과 조카 때 이르면 루터의 생각과 제도를 정말로 좋아해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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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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