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이너 김영세씨는 필드에서 연예인 못지않은 매력을 풍기는 인물이다.
“그러고 싶죠,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네요. 나는 원래 건성건성 하는 건 질색이에요. 지는 것도 싫어하고요.”
이경진씨는 1975년 MBC 공채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벌써 30년을 넘게 작품활동을 해온 셈이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물어봤더니 ‘에바다’라는 특집극이라고 했다. 수녀의 플라토닉 사랑을 그린 내용이다.
“제가 원래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고 한때 수녀가 되고 싶어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정말 작품에 몰입했죠. 작품이나 골프나 몰입할 때가 행복하잖아요.”
동반자들은 “골프를 해보면 성격이 드러난다더니 이경진씨 성격의 특징을 확인했다”고 한마디씩 한다. 골프로 확인한 그녀의 성격은 ‘진지함’이다.
“사실은 연예인은 잘나갈 때는 골프를 할 시간이 없어요. 야간촬영에 밥 먹을 시간도 없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일거리가 없어서 몇 개월씩 쉴 때가 있거든요. 이럴 때는 생활이 흔들리고 우울해지고 화가 나기도 하죠.”
이경진씨는 바로 이때 골프장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골프가 고맙다고 했다.
“불러주는 곳이 없는 실업자 시절에 촬영장 간다고 생각하면서 골프장에 가면 정말 진지하게 공을 칠 수밖에 없죠. 대충대충 치면 앞으로 좋은 작품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골프란 무엇인가. 흔히 가장 잘나가는 사람들이 가장 잘나갈 때 즐기는 게 골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골프장에는 외로운 사람도 오고 슬럼프에 빠진 사람도 온다. 그래서 골프장은 심신을 연마하는 곳이기도 하다.
골프도 디자인이다
사람들을 골프장에서 보면 대체로 평상시보다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아마도 자연 속에서 마음을 열어놓고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 사람도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연예인들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드에서 모든 연예인이 다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지나친 스타의식 때문에 분위기를 망쳐놓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필드에서 만나본 사람 중에 연예인 못지않게 매력을 발산하는 CEO도 적지 않다. 그중 한사람을 꼽으라면 산업디자이너 김영세씨가 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잘 알려진 산업디자이너인 그는, 빌 게이츠가 ‘디지털 라이프 시대를 여는 제품’이라고 극찬한 아이리버 MP3를 디자인한 당사자다. 삼성전자 휴대전화, LG전자 냉장고 등 국내외 유명제품을 혁신적으로 디자인해 최근 수년 사이 각종 산업디자인 상을 휩쓴 이 분야의 국제적 스타다.
그에게 일류 골프장의 조건을 물어봤더니 역시 코스 디자인을 꼽는다. 그의 철학은 바로 ‘디자인 우선(Design first)’이다. 그렇다면 디자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는 “디자인에는 외형적인 아름다움만큼 이면에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혁신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디자인은 혁신이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며, 가장 가까운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는 게 그가 말하는 디자인의 정의다.
그는 몇 년 전 미국에서 여성용 전동 드라이버를 만들어 히트시켰다. 스크루 드라이버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사용하는 투박한 도구였다. 전통적인 사용자만을 염두에 둔 디자인을 파괴하고 아름답고 편한 여성용 전동 드라이버를 개발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여성의 즐거움과 행복을 염두에 두고 아이디어를 내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게 그의 디자인 철학이다.
드라마보다 좋은 이유
“골프를 배운 지는 오래됐어요, 1970년대 미국 유학 중(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에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골프는 오래 쳤다고 잘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점수관리보다는 코스 디자이너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즐겁게 치는 편입니다.”
골프를 통해 무엇을 얻느냐고 물어보았다. 행복감과 절망감을 함께 느낀다고 했다.
“처음부터 디자이너가 구상한 것이 이중적 장치죠. 골퍼가 공을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 거죠.”
그러고 보니 골프장에 갈 때 상을 많이 받는 날이 있고 벌을 많이 받는 날이 있는 것 같다. 자만심, 무모함, 산만함, 분노, 방심 등에는 가차 없이 벌을 내리고 신중함, 집중, 평정심, 지혜로움에는 상을 주는 게 바로 골프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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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나는 퍼팅감이 좋아서 롱퍼팅한 공이 몇 번 컵에 떨어졌다. 나는 79타를 쳤고 김 대표는 전반 40, 후반44로 84타를 쳤다. 라운드가 끝나자 김 대표는 내 퍼터를 잡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때 이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의 눈빛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만약 그가 골프채를 디자인한다면!’
골프장이란 무엇인가. 나는 골프장이 인간의 매력과 반매력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라운드해보면 개성도 알 수 있고 인간성도 알 수 있다. 골프는 흥미진진한 18회 드라마다. 필드에서 매력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한없이 행복하고 또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반매력적인 사람은 다음부터 안 만나면 그만이다. 남이 뭐라고 하든 이것이 내가 TV드라마보다 골프를 더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