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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수집에서 전쟁영화 엑스트라 출연까지

군복수집에서 전쟁영화 엑스트라 출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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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방 안에서만 노는 것은 군복수집이 주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의 일이다. 군복이란 물건의 본래 용도-땅바닥을 기고 수풀을 헤치는-인 전장 한가운데 서야 입는 맛이 나는 법. 이래서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어른들의 전쟁놀이’인 서바이벌게임이다. 콩알만한 BB탄을 쏘는 모형총을 이용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전투체험을 할 수 있는 서바이벌게임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단순히 게임 그 자체를 즐기는 형, 야외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소풍 나온 기분으로 가족을 대동해 낮잠과 불고기 파티를 벌이는 형, 서로 쏘고 맞히는 게임보다는 전장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내 경우는 후자에 가까운데, 이런 사람들끼리 모여 즐기는 새로운 형태의 서바이벌게임이 있으니 이른바 리인액트먼트 게임이다. 이것은 역사재연게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당시의 복장과 장비, 총기류까지 완벽하게 고증을 마쳐 특정 전투를 그대로 재연해 내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런 행사가 전무했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매우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 기념 리인액트먼트나 배틀 오브 벌지, 노르망디 상륙작전 리인액트먼트 등은 아주 유명한 사례.

우리나라에서 이뤄지는 리인액트먼트는 대부분 베트남전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2차대전이나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리인액트도 기획하고 있다. 리인액트먼트 게임의 특징은 전장의 재현이라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파월 맹호부대원들이 화랑담배를 피워문 채 정글을 수색하고, 얼룩무늬 군복의 청룡부대원들이 반합을 끌어안고 밥을 먹고 있는 광경을 보노라면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려놓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전투가 시작되면 참가자들은 영화나 책, 사진자료를 보며 익힌 당시의 행동방식을 재연해내며 움직인다. 당시 유행한 군가를 흥얼거리는가 하면 입이 건 선임하사를 맡는 친구도 있다. 전투는 최대한 실감나게 한다. 바닥이 진흙탕이든 개울이든 적이 나타나면 뛰고 구르며 박박 긴다. 지휘관의 ‘사격개시’라는 구령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BB탄이 연발로 튀어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라라라락. 투투툭’.



멀리서 달려오던 월맹군 한 명이 총을 맞더니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펄쩍 튀어 오른다. 장교 한 명이 쓰러진 월맹군에게 다가가 몸수색을 한다. 옆구리에 숨긴 지도를 꺼내 펼쳐드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총알이 철모에 맞는다.

‘으아악. 위생병! 위생병!’

가자 전장으로!

바람처럼 달려온 위생병이 소대장을 치료하는 동안 소대원들은 소대장의 복수를 하겠다고 일제히 돌격해 들어간다. 이처럼 리인액트먼트 게임은 실제 전투를 그대로 복사해 내기 때문에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실제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일단 그 자체를 즐기지만 여기에는 단순한 재미말고도 주목할 만한 효과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게임이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이라는 것. 일반 박물관에 가보면 그 밋밋한 전시방법과 빈약한 전시물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 전혀 입체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활동상을 짐작하기 어렵다.

리인액트먼트 게임은 골동품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 실제로 어떻게 쓰였는지를 그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자료다. 이런 효과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국경일이나 전승·참전 기념일 등에 대대적인 리인액트먼트 게임을 벌인다. 이런 대규모 리인액트먼트 게임에는 병사들은 물론이고 당시의 차량, 탱크, 비행기, 군함까지 동원된다. 후세들에게 그들의 아버지 세대나 선조들이 어떻게 나라를 지켜왔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역사교육 아닐까?

인천시와 해군본부는 인천상륙작전 50주년을 맞아 인천상륙 리인액트먼트 행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외국의 참전 베테랑과 전문 리인액터를 초청하는 대규모 행사로 기획했다는데, 예산이 턱없이 적게 배정되어 행사 개최 자체가 불투명한 모양이다. 불과 한 시간 남짓이면 끝나는 기념식에는 엄청난 예산을 쓰면서 이런 행사에는 인색한 것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문화적 후진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취미생활은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다. 이런 개인적인 생활도 깊이가 깊어지다보면 그 지식을 환원할 기회가 생긴다. 군사애호가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애호가들이 나름의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군사지식을 쌓는 것에 주력했던 사람들은 대개 책을 저술하는 일을 하는데, 대부분 과거의 딱딱한 군사평론집 형태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이 무기나 전쟁의 본질을 쉽고 재미있게 알 수 있게 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군사관련 잡지나 소설 ‘데프콘’ 같은 가상 전쟁소설도 이런 아마추어 군사애호가들이 만든 것이다. 이중 ‘데프콘’의 경우 각기 해군, 육군, 공군 분야에 지식이 깊은 아마추어 군사애호가 세 명 이상이 모여 토론을 통해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공동집필을 하는 실험적인 형식을 선보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쉬리’ 촬영 현장을 누비며

소설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노하우를 전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영화라는 매체와 결합하는 것이다. 얼마 전 국내에서 최초로 경찰 특공대가 실감나게 등장해 눈길을 끌었던 영화 ‘퇴마록’의 특공대원들은 전원이 서바이벌 게이머다. 이들은 KOSSA(한국서바이벌게임연맹) 소속 회원들 중에 지원을 받아 구성된 팀으로, 각자 복장을 갖춘 사람들 속에서 선발되었다.

팀이 꾸려진 다음에는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 훈련기간을 가졌는데, 실제 미국 경찰특공대에서 사용하는 교본을 이용해 실내진압 전술을 익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촬영장에 투입된 서바이벌 게이머들은 감독의 간단한 상황설명만 듣고도 각자의 움직임은 스스로 만들어냈다. 감독 또한 액션장면에 특별한 간섭 없이 게이머들의 평소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데 주력하여 멋진 그림을 만들어 냈으며 ‘최고의 배우들’이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90년대 한국 영화계 최고의 히트상품이라고 하는 ‘쉬리’ 또한 군사애호가의 손길이 깊숙이 닿은 사례다. 난 군사전문잡지 기자로 일하는 덕에 이 영화의 초기 기획단계부터 진행상황을 주시할 수 있었다. 영화 제작과정에 자문이나 의상, 특수효과 등 스태프로 일하는 분들이 모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동호인이기 때문에 직·간접으로 자료협조 요청을 받았다. 극중 폭발물처리 대원이나 지뢰탐지반 등의 모습이 내가 전해준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외국에서는 총기가 등장하거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 때 군사애호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전문적인 군사연구가는 지식의 깊이와 질은 높지만 학자 특유의 딱딱한 사고방식 때문에 유동적인 영화예술에 접목하기가 어려운 반면, 아마추어 군사애호가들은 상대적으로 사고방식이 유연하므로 자신의 지식을 영화적 설정에 재미있게 가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인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군인 엑스트라들은 실제 아일랜드군 병사들이지만 연기력이 필요하거나 가깝게 찍어야 하는 조연급 배우진은 상당수의 리인액터를 기용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영화에 필요한 의상이나 소품을 직접 소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식으로 화면에 등장시켜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www.kossa.or.kr

한마디로 감독이 ‘공격 장면이야’ 하는 지시만 떨어뜨리면 자기들이 다 알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자잘한 연기 지도나 장면 설명이 전혀 필요가 없었다. 이런 자세한 설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일을 얼마나 쉽고 빠르게 하는지는 단 한 번이라도 영화촬영 현장을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차량과 전차조차 모두 개인 수집가들의 소유물을 임대해 촬영에 동원한 것이다. 이렇게 열성적으로 참여한 수집가와 리인액터들 덕분에 영화는 1944년 여름의 노르망디 전투현장을 생생하게 되살려 놓을 수 있었고 전세계적으로 대히트를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이런 영화가 하나쯤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날이 오면 정말 신명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까지 군사애호가의 세계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해 보았는데, 혹시 흥미가 있는 분들을 위해 입문할 수 있는 길을 알려드리며 글을 마칠까 한다. 현재 밀리터리 관련 서적은 몇 종이 있지만 대부분 군인이나 전문 군사연구원을 위한 책들이다. ‘밀리터리 월드’ ‘군사세계’ ‘국방과 기술’ 등의 잡지가 이에 해당한다. 일반인을 위한 밀리터리 관련지식이나 서바이벌게임, 리인액트먼트 게임 등을 소개하는 잡지로는 (주)호비스트에서 발행하는 월간 ‘플래툰’이 있다.

서바이벌게임 쪽에 흥미를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하이텔에 접속해 GO SGA를 입력하면 서바이벌게임 동호회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 밖에 기타 통신사에도 서바이벌게임 동호회가 활동중이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분이라면 www.kossa.or.kr로 가시면 한국 서바이벌게임 연맹의 홈페이지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지부별로 신규회원의 가입 및 활동을 도와주고 서바이벌게임 전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신동아 200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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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랑 월간 ‘플래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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