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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과 자장율사의 합작품 황룡사 구층탑의 비밀

선덕여왕과 자장율사의 합작품 황룡사 구층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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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18년(644) 1월에 당 태종은 고구려를 정벌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에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사신으로 보내 백제와 함께 신라의 침략을 그치지 않으면 명년에 군대를 보내 공격하겠다고 위협한다. 대권을 장악한 막리지 연개소문은 신라가 수나라 공격 때 틈을 타 빼앗아간 고구려땅 500리 지경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당의 강요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러자 상리현장은 “이왕지사를 따져 무엇하겠느냐” 하면서 “요동의 여러 성이 본래는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으나 중국이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고구려는 어째서 옛 땅을 반드시 되찾으려 하느냐”고 따진다. 이것은 고구려 침공의 빌미를 찾으려는 당의 술책이었다.

정관 18년 2월에 당 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 온 상리현장의 보고를 받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의 자리를 도둑질했으며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대했고 지금 또 내 조명(詔命)을 어겼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 침공의 뜻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자 초당(初唐) 3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명필 저수량(遂良, 596∼658년, 도판 6)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자격으로 고구려 침공을 만류한다.



“폐하가 지휘하면 중원이 맑고 평안하며, 돌아보면 사방 오랑캐들이 두려워 복종하니 위엄과 신망이 큰 때문입니다. 이제 바다를 건너 작은 오랑캐를 원정하시다가 이기면 모르거니와 만일 차질이 생기면 위엄과 신망을 손상할 것이고 다시 분김에 군사를 일으키면 안전과 위험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세적(李世勣, 592∼667년) 같은 무장은 돌궐계의 설연타가 들어와 도적질하는 것은 위징(魏徵, 580∼643년)의 말을 들어 이를 토벌하지 않은 탓이라 하며 이 기회에 고구려를 쳐 없애자고 주장한다. 이 말이 맘에 든 당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이는 진실로 위징의 실수였다. 짐이 곧 후회했으나 말하지 않은 것은 좋은 꾀를 막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당 태종이 이렇게 고구려 침공의 뜻을 굳히자 저수량은 그 친정(親征)이라도 막아보려고 2, 3명의 맹장으로 하여금 4만∼5만 군사를 거느려 정벌하게 하라고 상소한다. 이에 다른 신하들도 뒤따라 친정의 불가를 간한다.

그러나 당 태종은 “요순 같은 임금도 엄동설한에는 씨앗을 싹틔울 수 없지만 촌사람이나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봄이 되면 누구나 씨앗을 싹틔우는 것은 천시(天時)가 이르렀기 때문이니 천시가 이르면 사람이 그 공을 세워야 한다”며 고구려 정벌의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7월에는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 ?∼656년) 등을 양자강 중류 파양호변 강서지역의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로 내려보내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미를 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이 지역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피해가 비교적 적은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염입덕은 수나라 장작대장으로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시 요동에서 공성기구를 제작하는 등 많은 군공을 세운 염비(閻毗, 564∼613년)의 장자로서 역시 조형술이 뛰어나 이런 직책을 맡았다.

이어서 영주(營州)도독 장검(張儉)에게 조서를 내려 유주·영주의 양 도독 군사와 거란·말갈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요동을 건드려 그 형세를 살피게 하고, 태상경(太常卿) 위정(韋挺)을 궤운사(饋運使)로 삼아 하북의 군량미를 운송하여 요동에 이르는 요소마다 비축하게 하며, 태복소경(太僕少卿) 소예(蕭銳)에게는 운하로 하남의 군량미를 운송하게 했다.

준비가 대강 끝나자 11월 임신(壬申)에 당 태종은 낙양으로 나와 수나라 침공시 참전하였던 원로대신 정원숙(鄭元璹) 등에게 그 책략을 묻고 갑오일에 침공의 진용을 짰다. 우선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물길에 능한 강회(江淮)와 영협(嶺峽) 병사 4만 명 및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용사 3000명을 이끌고 전함 500척에 태워 산동반도 내주(萊州)를 출발하여 평양으로 쳐들어가게 했다. 그 다음 태자첨사 좌위솔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및 서쪽 난주와 하주에서 항복한 돌궐인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했다.

이어 당 태종은 천하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침공하는 이유를 밝힌다.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므로 정리상 참을 수 없어 응징하러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수 양제가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것은, 백성을 잔인하고 포악하게 대한 수 양제가 백성을 어진 마음으로 사랑한 고구려왕을 쳤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자신의 침공이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5개항의 이유를 제시하는데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친다(以大擊小) △순리로 반역을 친다(以順討逆) △다스림으로 어지러움을 이긴다(以治乘亂) △편안함으로 피곤함을 기다린다(以逸待勞) △기쁨으로 원망을 당적한다(以悅當怨)가 그것이다.

당 태종은 이렇게 진용을 짜고 천하에 고구려 정벌의 조서를 반포한 다음 친히 6군을 총괄하여 요동을 침공해 들어간다. 이에 앞서 행군총관 강행본(姜行本)과 소부소감(少府少監) 구행엄(丘行淹)으로 하여금 장인들을 독려해 사다리와 충차 등 공성기계들을 안라산(安蘿山)에서 만들게 하였는데, 태종은 친히 나가 이를 점검하고 시험해 보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한다.

드디어 정관 19년(645) 2월에 당 태종이 낙양을 출발했고 요동도행 군대총관 이세적은 4월 초하룻날 요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렀다.

뒤이어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신성(新城)에 이르고 영주도독 장검이 돌궐족을 거느리고 건안성(建安城)으로 달려들어 출격한 고구려군 수천명을 살해한다.

이세적과 도종은 힘을 합쳐 겨우 개모성(蓋牟城) 하나를 함락하는데, 5월 기사에 들어서야 평양도행군총관 정명진(程名振)은 요동반도 끝 해안요새인 비사성(卑沙城)을 함락한다.

마침내 5월 정축에 당 태종이 요수를 건넜다. 요서 200여 리가 진흙탕이 돼 인마가 통행할 수 없으므로 장작대장 염입덕이 흙을 깔아 토교를 만들어 군대를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나서였다. 이때 이세적과 도종은 요동성을 맹공했으나 미처 함락하지 못했다.

당 태종은 요수를 건너고 나서 다리를 허물어버려 달아나지 않을 뜻을 보였고, 요동성 아래로 수백 기를 거느리고 가 성 밖에서 토산을 쌓느라 흙짐 지는 군졸들의 흙을 말 위에서 져다 나누어 주기도 하는 등 독려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요동성의 저항이 워낙 강해 정병을 모두 끌고 와 수백 겹의 포위 공격을 가하고 나서야 겨우 함락할 수 있었다.

당 태종의 안시성 대참패

이어서 당 태종은 6월 정미에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러 떠나는데 10일 만에 도착한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으로 하여금 15만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당 태종의 전략에 말려 참패당하고 결국 3만6800명의 군졸과 함께 항복하고 만다. 이에 당 태종은 이세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듣자 하니 안시성은 험하고 병세가 정예하며 그 성주는 재주와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며 굴복하지 않았으니, 막리지가 공격했으나 떨어뜨릴 수가 없으므로 이로 인연해서 안시성을 그에게 주었다 한다. 건안성은 병세가 약하고 양식도 적다 하니 만약 뜻밖에 나타나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 건안성이 떨어지면 안시성은 내 뱃속에 있을 뿐이다. 이는 병법에서 이른바 성에는 치지 않을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세적은 이렇게 대답했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서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미를 운반하는 길을 끊는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을 치며 가서 건안성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당 태종은 “이미 공으로 장군을 삼았으니 장군의 뜻대로 하되 내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하며 안시성 공격을 허락한다. 그런데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을 바라보고 성 위에 올라가서 북을 치며 야유한다. 당 태종이 분노하니 이세적은 성을 함락하는 날 성안의 남자는 모두 죽이자고 청한다. 이 소문을 들은 안시성 사람들은 더욱 성을 굳게 지켜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이때 고혜진이 안시성을 버려두고 오골성(烏骨城)을 친 다음 비사성의 장량 수군을 불러 평양성으로 곧장 쳐들어가자는 계략을 제시한다. 태종이 이를 따르려 하자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적극 반대하고 나선다. 그의 말은 이렇다.

“천자의 친정은 제장과 달라서 위험을 무릅쓸 수 없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오랑캐 무리가 아직도 10여만 명이나 있으니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모두 우리 뒤를 밟아올 것이다.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성을 취한 다음 길게 몰고 나간다면 이것이 만전지계(萬全之計; 만 가지로 안전한 계책)다.”

이에 여러 장수가 급하게 안시성을 쳤으나 끄떡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강하왕 도종은 성의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올려 성 높이에 가깝도록 했다. 그러자 성 안에서도 성을 더 높이 쌓아 이를 막고 군사들이 교대로 지키니 하루에도 6, 7합을 겨뤘다. 충차(衝車)로 돌을 쏘아 올려 그 성의 층집가퀴를 무너뜨리면 성안에서는 목책(木柵)으로 무너진 곳을 막았다.

당 태종은 도종이 발을 삐자 친히 침을 놓아줄 정도로 극진히 장병을 독려하여 산 쌓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으니 60일이 되자 동원된 인원이 50만 명에 이르렀다. 결국 토산이 이루어지고 성에서 몇 길 떨어진 토산 마루에 오르면 그 아래로 안시성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이에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산마루에 머물며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며 성을 무너뜨렸다. 때마침 복애가 몰래 자리를 비웠으므로 고구려군 수백 인이 성이 무너진 틈에서 나와 드디어 토산을 빼앗아 차지하고 해자를 둘러 지켰다.

당 태종이 노해서 복애를 참수해 조리돌리고 제장에게 명령하여 3일 동안 연속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길 수가 없었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 나와 죄를 청하자 당 태종은 마땅히 죽어야 하나 개모성과 요동성을 깨뜨린 공을 참작하여 특사로 죽음을 면하게 하며 바로 회군할 것을 명령했다. 요동지방은 추위가 빨리 와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떨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당 태종이 9월에 안시성 아래에서 열병(閱兵)을 하고 돌아서서 떠나는데, 성 안에서는 모두 인적을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홀로 성 위에 올라 전송했다. 이에 감격한 당 태종은 성을 잘 지킨 것을 치하하고 비단 100필을 놓고 가며 왕을 힘써 섬기라고 했다 한다.

싸움에 져본 일이 없다는 당 태종이 10여만 대군을 직접 몰고 와서 두 달 동안이나 안시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고 회군한 것이다.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당 태종의 심경은 참담하기 그지없었을 터인데, 당장 고구려군의 추격이 두려워 이세적과 도종을 후군 대장으로 삼아 4만 군사로 후방을 방비하면서 황급히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요하 일대의 진흙탕은 인마의 발을 묶어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몰려오는 추위는 전쟁의 참패로 심신이 피폐해진 병사들의 육신을 얼려 놓으니 얼어죽는 자가 속출했다. 당태종은 장손무기로 하여금 장병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깎아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도록 하면서 회군을 서둘렀다. 얼마나 마음이 조급한지 그 자신이 말 채찍에 풀을 매달아 풀 옮기는 일을 솔선해 장병들을 격려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때 당 태종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과는 목적과 조건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호언장담하고, 필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열거하며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조서까지 반포하면서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선발대가 요수를 건넌 지 불과 5개월 만에 안시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수많은 군사를 잃은 채 양식이 떨어져 허겁지겁 쫓기듯 군사를 되돌렸으니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영웅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이때 당 태종은 입고 떠난 옷을 갈아입지 못해 의복이 해어져 걸레 같았다 한다. 차라리 필승의 조건을 열거한 조서나 반포하지 않았더라면 덜 창피했을 텐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된 참담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깊이 후회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만약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길이 있지 않게 했으리라(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삼화령(三花嶺)의 석미륵(石彌勒)

자장이 신라로 돌아오던 해인 선덕여왕 12년(643)은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9월 공략설’이 널리 떠돌던 불안한 해였다. 그래서 신라는 자장을 불러들였고, 당 태종은 이를 이용해 고구려 침공의 기회를 삼으려 자장에게 물심양면으로 희망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에 자장은 귀국하자마자 선덕여왕이 특수 신분을 타고난 성골로 미륵보살이란 사실을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확인받은 사실을 공포하고,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고구려와 백제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래서 전국민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공에 시달리는 사이 이 거대한 조탑불사를 이루어낸다.

그러나 이 일만으로는 선덕여왕을 신격화하기엔 부족한 듯, 미륵보살상이 아닌 미륵불상을 조성하여 은근히 선덕여왕을 하생한 미륵불로 승격하는 일을 진행했다. 그렇게 해서 조성된 것이 현재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다.

의 주존인 미륵불상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걸터앉은 상)으로 높이가 160cm이며, 좌우 협시보살은 모두 입상인데 좌측은 높이가 100cm, 우측은 98.5cm이다. 이 불상을 미륵불로 보는 것은, 중국 돈황 막고굴에서 북량(北凉)시대인 430년경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근 200년 동안 줄기차게 조성돼온 하생미륵불좌상의 형태가 거의 이런 의좌불 형식(도판 7)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생미륵불이 의좌불 형식으로 표현된 것은 막고굴뿐 아니라 운강석굴과 용문석굴, 맥적산석굴 등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으며 단독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이런 의좌불 형태의 미륵불상 조성이 특히 600년대를 전후한 수·당 통일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아마 이 시대 사람들이 통일을 이룩한 군주를 하생미륵불로 보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벽화에서도 의좌상이 주존으로 등장하는 (도판 8)를 널리 그리고 있다.

그 결과 신라에서도 이런 의좌불 형식의 미륵불삼존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바로 그것이다. 이 양식은 수양제 대업(大業) 6년(610) 전후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돈황 막고굴 제410굴 서벽 감실 속에 모셔진 (도판 9) 양식을 계승한 듯한 느낌이 강하다.

4등신에 가까우리만큼 넓고 큰 동안형의 얼굴, 머리칼을 표현하지 않은 깎은 머리 형태에 나지막하고 작은 육계, 오른손을 시무외인처럼 무릎 위로 올리고 왼손을 무릎 위에 대 여원인을 지은 손짓 등이 한눈으로 보아 막고굴 미륵상과 양식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다만 (도판 10)은 시무외여원인의 본 뜻을 헤아리지 않고 조형성에 탐닉하다 보니 손가락을 모두 꼬부려 수인의 의미를 망각한 것이나, 양 무릎에 옷주름 무늬를 나선형으로 돌리는 양식화 현상을 보인 것이 중국과 다르다. 얼굴이 차지하는 비례가 더욱 커지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친근감을 보여주는 것도 차이점이다. 이마가 좁고 백호가 없으며 코가 더 커지고 볼이 풍만하며 목이 짧아지고 귀가 길어진 것도 서로 다른 점이다. 목은 짧아졌는데 귀가 더 길어지니 귓불이 어깨를 덮어내리는 특이한 표현을 하고 있다. 옷주름을 간소화하면서 얇게 표현한 것은 신라만의 특징적인 표출이라 할 것이니, 이는 뒷날 과 으로 이어지는 신라 고유 양식이기도 하다.

이런 차이는 오히려 이 을 범본으로 삼아 조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만큼 서로 깊은 양식적 유대감을 보여주고 있다.

주불의 양 옆에 시립한 좌·우 보살 입상은 ‘애기보살’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을 만큼 앳된 소년소녀의 모습인데 역시 4등신에 못 미칠 만큼 얼굴이 커서 동자와 같은 체구를 보여준다.

단순한 삼산관(三山冠) 형태의 보관을 쓰고 가슴에 구슬 목걸이를 걸었다. 상체는 벌거벗은 채 천의만 두 어깨에 걸쳤는데, 천의자락이 앞면으로 내려와 배와 무릎 근처를 이중으로 가린 다음 그 양끝은 두 어깨로 다시 올라가 어깨 뒤에서 각기 양쪽 발끝까지 흘러내리게 하는 독특한 처리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몸매를 천의자락이 지탱해주는 것 같은 의외의 효과를 드러낸다.

주불의 위엄 속에 숨긴 미소와 대조적으로 두 보살은 아기 같이 천진하고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왼쪽 보살은 왼손에 연꽃 봉오리를 들고 오른손으로 연잎을 들었으며, 오른쪽 보살은 왼손으로 악기 같은 지물을 어깨 높이까지 받쳐들고 오른손은 그것을 받쳐주는 듯한 손짓을 하고 있다.

이 은 1925년 4월 경주군 내남면 월남리 산등성이에서 발견돼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옮겨왔는데 발견 당시 남향한 큰 고분 속에 모셔져 있었다고 일본인 학자는 기록해 놓고 있다. 발견 당시까지만 해도 땅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상호가 완전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산아래 동네 나무꾼 아이들의 철없는 장난으로 코가 떨어져 나갔다 한다. 참으로 아깝고 분한 일이다. 이때 이미 두 보살 입상은 월남리 민가로 옮겨 숨겨놓았으므로 비슷한 시기에 모두 경주박물관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한다.

일인학자가 발견 당시에 고분 속에 묻혀 있었다고 기록한 내용은 광복 후 황수영 선생의 연구 결과 고분이 아닌 인조석굴이었음이 밝혀져 석굴암의 선구 형태가 이 시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이 이 자장과 연결된 사유를 기록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삼국유사’ 권3 생의사(生義寺) 석미륵(石彌勒)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선덕왕 때 석생의(釋生義)는 항상 도중사(道中寺)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 어떤 승려가 와 남산으로 끌고 올라가면서 풀을 묶어 표시하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남산의 남쪽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청컨대 대사는 꺼내다가 산마루 위로 옮겨 주시오.’ 꿈을 깨고 나서 친구들과 함께 표시를 따라 찾아가니 그 골짜기에 이르렀다. 땅을 파자 돌미륵이 있는지라 꺼내다가 삼화령 위에 모시고 선덕왕 13년 갑진(644년)세에 절을 지어 살았다. 그래서 뒤에 생의사라 했다.”

선덕여왕 13년에 돌미륵을 남산 삼화령 밑 남쪽 골짜기에서 파내 삼화령으로 옮겨 모신 것이 바로 이라는 것이다. 땅에 묻혀 있다가 꿈에 현신한 것은 종교적 신비성이니 논외로 친다 해도, 이 미륵삼존상이 적어도 선덕여왕 13년(644)에 이미 조성된 것은 사실이라 할 것이다. 자장이 돌아온 바로 다음해다.

자장은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 위해 여왕의 특명을 받고 당나라로 가서 중국 오대산에 살고 있다는 문수보살로부터 그 사실을 인정받고 돌아왔다. 자장은 진골 출신으로 왕의 지친이었기 때문에 당 태종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중국 각처의 성지를 여행했을 터이니 그가 돈황 막고굴이나 대동 운강석굴, 낙양 용문석굴 등을 참배했을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하생미륵불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이를 신라에 재현할 생각을 했을 듯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필 남산 북쪽 봉우리 해목령(蟹目嶺) 아래의 작은 산마루인 삼화령에 이 미륵불 삼존상을 조성해 모실 생각을 했을까.

그 이유는 ‘삼국유사’ 권5 명랑신인(明朗神印)조에서 찾을 수 있는데, 뒷날 신인종(神印宗)의 종조(宗祖)가 된 명랑(明朗)법사가 자장율사의 누이동생인 남간(南澗)부인의 아들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랑법사는 바로 삼화령 밑동네인 남간 마을에서 나고 자랐을 것이다. 자장의 매제, 즉 명랑의 부친은 사간(沙干) 재량(才良)이었다 하는데 아마 박씨였을 듯하다. 박혁거세의 능인 오릉과 박씨 왕인 일성왕릉의 연장선상에 남간 마을이 있으니 이 일대가 박씨의 세습 주거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본래 박씨는 반불교적인 성향이 커서 김씨 왕조가 불교를 수용해 주도이념으로 삼아가는 데 항상 견제해 온 듯한데, 김씨 왕조는 그때마다 내외척으로 혈족 관계인 박씨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해결해 왔다.

따라서 이 미륵불상을 박씨들이 대물려 사는 남간 마을 뒷산에 조성해 모심으로써 민심의 완벽한 결집을 내외에 천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꿈을 꾸고 땅 속에서 파내게 하는 종교적인 신비화 과정을 거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남간부인의 세 아들, 즉 자장율사의 생질 삼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첫째는 국교(國敎) 대덕(大德), 둘째는 의안(義安) 대덕이 되며, 막내가 명랑법사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석생의가 혹시 뒷날 의안(義安)대덕으로 불리는 인물일 수도 있다. 더구나 명랑법사는 벌써 자장에 앞서서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자장이 당나라로 떠나기 직전인 정관 9년(635)에 돌아왔다고 하니, 외숙인 자장에 앞서 정세를 살피기 위해 사전 답사를 다녀왔다고 보아야 한다. 두 집안이 이렇게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의 조성도 이들과 결코 무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신동아 200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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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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