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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자의 촌철살인, 자연·해학·고독의 노래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 감상법

17자의 촌철살인, 자연·해학·고독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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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하이쿠시인 바쇼가 그린, ‘코고는 소리 그림’ 이라는 낙서 같은 그림이 있다. 애제자 도코쿠와 여행하다가 함께 여관에 묵었는데 이 사람이 어찌나 요란스럽게 코를 고는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그 소리를 장난삼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푸대 같은 것이 좁아졌다 늘어졌다 하는 모양으로 그려서는 그 폭을 한 치, 세 치 등으로 표시하여, 제일 요란하게 고는 부분을 넉자 반으로 적어 놓았다.

또, 동북기행중에는 묵을 곳이 없어 헛간을 빌려 눈을 붙이며, “벼룩과 이/ 말이 오줌싸는/ 베갯머리”라는 하이쿠를 읊고 있다.

이와 같이 하이쿠는 삶을 해학적으로 객관화하는 태도를 바탕에 깔고 있다. 하이쿠와 일본의 전통시가 다른 점은 그 길이의 짧음이라는 것 외에 이러한 대상파악 방법이라고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하이미(俳味)’, 즉 하이쿠적인 맛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담담하고 자유로우며 해학적이고 서민적인 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색채감이 나는 부손의 하이쿠에는 이와는 또 다른 측면의 유미주의적·도회적 성향이 있지만, 하이쿠의 발전단계에 있어서는 해학적인 담담함으로 인해 서민의 애환을 위무하는 시로 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쇼의 “겨울 바람이여/ 볼이 부어 쑤시는/ 사람의 얼굴”이라든가, “헤진 여름옷/ 아직도 이(蝨)를 다/ 잡지 못하고”, “고양이 사랑/ 끝날 적 침실에는/ 어스름 달빛”과 같은 것이 그렇다.

선적인 깨달음으로 알려진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퐁당!”의 경우도 사실은 선적인 깨달음이라는 의미 이상으로, 전통시에서 개구리 울음만을 운치있게 읊어왔던 시적 컨텍스트를 벗어나 개구리가 우스꽝스럽게 몸을 뻗는 실체를 연상케하고 그 개구리가 퐁당하는 소리가 멍하니 있던 자신을 깨우는 듯한 파격적인 해학을 동반한 것이다.



하이쿠가 길이는 짧은데도 좀더 긴 형식의 와카(5/7/5/7/7의 운율을 지닌 정형시)와 달리 우리 정서와 부합하는 면이 많은 것은 이러한 소탈하고 해학적인 대상파악 덕인지도 모른다. 삶의 괴로움을 승화시킨 해학적인 소탈함이라면 단연 잇사가 한몫을 하고 있다. “뒷골목에는/ 개 뒷간 위로도/ 첫눈내리고” “매화향기여/ 그 누가 찾아와도/ 이빠진 찻잔” “소변을 보고/ 몸을 떠니 비웃어라/ 귀뚜라미여” “텅빈 배에/ 천둥소리 울리는/ 여름들이여” “이것이 고작/ 마지막 살 집인가/ 눈이 다섯자” “타버린 집터/ 따끈따끈하구나/ 벼룩 설친다”와 같은 것으로, 강단에서 이 시들을 학생들에게 제시하면 설명없이도 이해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이쿠 탁상’의 세 다리가 된 시인들

하이쿠가 오늘날 일본의 국민시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이쿠라는 탁상의 멋진 세 다리가 된 세 명의 위대한 하이쿠 시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쇼(松尾芭蕉·1644~1694), 부손(謝蕪村·1716~17 83), 잇사(小林~茶·1763-1827)가 바로 그들로, 이들은 하이쿠라는 탁자에 여러 가지 음식을 올려 놓을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 놓았다.

바쇼는 “파초에 태풍불고 물대야에 빗소리 듣는 밤이여”라는 그의 시처럼, 파초와 같이 비바람에 찢기기 쉬운 식물을 사랑하고 그 스산함을 사랑했던 시인이다. 자신의 이름도 파초라고 지었던 그는 집단의 놀이로 존재하던 하이쿠에 문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방랑하고 독서했던 구도자적 인물이다. 그리하여 하이쿠에 자연과 인생의 의미를 부여, 하이쿠가 예술적 보편성을 지닌 문학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시란 ‘짓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합일에서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변화하는 찰나적 아름다움에서 영원성을 발견하는 ‘불역유행(不易流行)’이라는 철학적 용어를 만들어냈다.

바쇼 하이쿠의 색깔은 수묵화처럼 수수하고 담백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화려한 유화(油畵)와도 같은 색감과 낭만을 부여한 시인이 있다. 바로 화가를 본업으로 하며 모란꽃을 특히 좋아했던 부손이다. 그는 “모란 잎져서/ 서로 포개어진다/ 두 세 이파리” “꽃을 밟았던/ 짚신도 보이는데/ 아침잠 깊고” “낮에 띄운 배/ 미친 여인 태웠네/ 봄날의 강물”같이, 선명한 인상(印象)이나 화려한 색감 속의 우수(憂愁)를 그려 하이쿠가 낭만적인 시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이러한 요소로 인해 유럽에서는 바쇼보다 더 알려져 있다.

잇사는 바쇼나 부손이 지닐 수 없었던 흙냄새 물씬나는 토속적인 시를 읊어 하이쿠가 명실상부한 민중시로 거듭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벼룩과 파리에/ 조롱을 당하면서/ 오늘도 저문다” “봄눈 녹아서/온 마을 가득한/ 아이들 소리”, 또 걸인을 읊은 “내민 찬합에/ 동전 서너개 뒹구네/ 저녁 겨울비”같은, 민중이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고통을 위무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반골정신과 너털웃음을 지닌 지극히 인간적인 시인이었다고 한다. 류시화시인이 ‘한줄도 길다’에 잇사의 시를 제일 많이 실은 것도 우리 정서와 잘 통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잇사의 시는 바쇼나 부손과 같은 여백이나 상징적인 맛을 떨어지지만 하이쿠를 민중시로 토착화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시인은 죽음에 임하여 “방랑에 병들어/ 꿈은 마른 들판을/ 헤매고 돈다”(바쇼), “흰 매화향에/ 하얗게 날이 새는/ 밤이 오누나”(부손), “이 대야에서/ 저 대야로 옮겨가는/ 요지경 인생”(‘잇사’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지었을 개연성도 높다고 알려짐)이라는 각자의 음색에 맞는 임종시를 남기고 타계했다.

마음의 쉼터, 여백

그렇다면 이 시점에 왜 하이쿠인가 하는 물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속도, 기능, 풍부함, 논리성을 추구하는데 익숙해 있고, 정보사회화에 따라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명확한 것, 자세한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사이버공간이나 바이오테크놀로지 등으로 자연의 순환 사이클을 잊어가고 있다. 무감각해진 정서의 반작용으로 지극히 자극적인 것에서 웃음을 취하려고도 한다.

하이쿠에는 이와는 반대 방향의 코드가 있다. 속도보다는 세월의 연륜을, 풍부함 보다는 여백을, 논리보다 비논리를, 명확한 것보다는 감춰진 매력을, 드라마틱한 것보다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으며, 모든 것을 자연속 순환 사이클 안에서 계절적 정서를 빌려 표현하고자 한다. ‘숨은 1인치를 찾았어요’라는 광고 카피처럼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의 한 여백을 찾아낸 듯한, 또한 속도감을 잊었다가 호흡을 조절하는 듯한 여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처럼 하이쿠는 그 짤막함 때문에 이 바쁜 현실에 읽기 편하고 여백의 쉼터를 주는 문화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늘날의 감수성과 통하는 대목도 적지 않다. 가령 “가을 깊은데/ 옆방은 무엇하는/ 사람인가”(바쇼)에서는 현대사회에서 느끼는 군중속 고독을 처절하게 느낄 수 있다. “서늘하게/ 벽에다 발을 얹고/ 낮잠을 자네”(바쇼)에서는 삶의 고단함 속에서 얻는 작은 휴식의 위안을 본다. “여름잡초여/ 무사들의 꿈이/ 사라진 흔적”(바쇼)에서는 17세기나 오늘이나 도도한 자연의 섭리 앞에 허무한 공명심을 읽고 “이 가을엔/ 왜 이리 늙는가/구름에 가는 새”(바쇼)에서는 늘그막의 적막감과 존재의 고독을 느낄 수 있다. “남의 말하면/ 입술이 시리구나/ 가을 찬 바람”(바쇼)나 “벌레를 죽이며/ 입으로는 말하네/ 나무아미타불”(잇사)는 오늘날에도 늘 보고 겪는 상황과 감성들이다.

앞서 언급했듯 하이쿠는 그들 문화의 문맥 속에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문화는 다분히 감성적이다. 감성은 대상의 변화 그 자체를 오감(五感)으로 감지하고 하나의 통합된 정서를 형성하지만 따져 설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분위기로 모든 것을 파악한다.

고래로부터 일본의 미의식은 직설적이지 않고 분명하지 않음을 그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 일본인이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말끝을 흐리며 여운을 남기는 것은 맺고 끊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인식하는 미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표현하지 않는 것을 아름답다고도 볼 수 있지만 때로는 그 모호함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시를 통한 모국어 갈고닦기

철학자이면서 최근 문화평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진우씨는 선(禪)이나 명상이 그 본래 의미와는 달리 상품화하는 경향을 지적하며 하이쿠도 그 문화의 본질과 동떨어져 상품화할까봐 우려한다. 하이쿠의 상품화는 경제성을 지닌 ‘왜색’ 정서의 잠입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하이쿠를 통해 이해할 수 없던 일본인들만의 독특한 표현방식을 읽어내고, 그들의 자연사랑과 미완의 미를 통해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의 삶에 힌트로 삼으면 족한 것이다.

또하나 하이쿠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일본인들이 하이쿠를 오늘날까지 사랑함으로써 일본어를 갈고닦는 점이다. 사실 하이쿠는 다작하는 그 가운데 수작이 생겨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유명한 하이쿠 작가들의 작품도 수만점 중에서 가려낸 수작들이 전해지는 것이다. 일문학자로 하이쿠를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의 고유의 리듬과 아름다움을 지닌 시조에 눈을 돌리게 된다. 섬나라 문학인 하이쿠에서는 우리 시조에서 만나는 인생의 달관과 너그러움에서 오는 ‘흥(興)’의 문화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조의 형식 안에 신세대의 감수성을 담은 작품이 나오지 말란 법 또한 없다.冬

신동아 200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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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옥희 계명대 어문학부 교수·일어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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