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인간을 성숙시킨다. 글쓰기도 그렇다.
일단 쓰면, 삶은 다른 옷을 입고 당신 앞에 나타날 것이다.
김영하(소설가)
어느 날 내가 작가가 됐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습작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특별한 문학 수업 방법이 있었냐는 질문이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해왔다.
“연애편지를 많이 썼다는 것밖에는 별다른 게 없었습니다.”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은 농담으로 생각했을 테지만 농담만은 아니었다.
연애편지는 우선, 독자가 분명하다. 독자의 취향과 성격, 수준이 분명하다. 단 한 명의 독자만 만족시키면 되는 글, 그것이 바로 연애편지다(때로는 상대방의 친구나 부모까지도 겨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경우는 예외로 하자). 타깃 독자가 분명하다는 것은 글쓰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누가 읽을지 모르는 글을 쓰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다.
또한 연애편지는, 목적이 분명하다. 연애편지는 대체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라는 확실하고 명쾌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목표가 분명해지면 글쓰기는 한결 쉬워진다. 작자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다양한 비유와 인용을 동원하게 되며, 그것을 통해 점점 더 자신의 글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반대로 목적이 불분명한 글은 쓰는 사람도 괴롭고 읽는 사람도 힘들다.
마지막으로 연애편지는, 작자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다. 그러니까 연애편지는 대충대충 쓸 수가 없는 글이라는 얘기다. 욕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욕망이 나로 하여금, 아는 것 모두와 가진 재능 모두를 소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뭔들 못하겠는가. 밤을 새워가며 시집을 뒤지게 만들고 수십 번에 걸쳐 글을 고치게 만든다. 연애편지의 이런 특성은 글이 언급하고 있는 대상, 즉 화제(話題)를 사랑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난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의 글이라면, 그의 문재(文才)가 아무리 박약하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전해져오는 따사로움이 있게 마련이다.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단지 애견협회에서 청탁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개에 관한 글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글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는 어렵다.
나는 좋은 글을 쓰는 일이 연애편지를 쓰는 일과 결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동적인 연애편지에 해당하는 덕목들은 고스란히 멋진 글에도 들어맞는다. 그러니까 혹시 지금부터라도 글쓰기를 시작하려는 분들은 연애편지적인 글쓰기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 되겠다. 우선, 독자를 한정한다. 연애편지처럼 한 사람이라도 좋고, 아니면 가족이나 회사동료도 좋다. 네루도 자기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려 ‘세계사 편력’이라는 명저를 완성한 바 있지 않은가. 두 번째로 글쓰기의 목표를 명확하게 정한다. ‘가족의 역사를 정리한다’ ‘내 인생을 반성한다’ ‘등산의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다’ ‘사람들을 울린다’ 등등 무엇이든 좋다. 목표 없는 글쓰기처럼 공허한 것이 없다.
목표를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글쓴이만큼은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김구의 ‘백범일지’나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지금도 읽히는 것은 그들의 글이 독립정신 고취나 방어임무 완수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얼마 전 자살한 한 고위공직자의 유서가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그 글이 궁지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변명한다는, 자기 스스로도 납득 못할 어설픈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애편지적 작법의 마지막은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택하라. 아이, 꽃, 나무, 자전거, 오토바이, 여배우, 뭐라도 좋다.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쓰는 일은 일단 즐겁고 유쾌하다. 적어도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쓰는 것보다야 얼마나 좋은가.
이 정도면 연애편지적 글쓰기의 요체는 다 정리된 셈이다. 이제는 그저 쓰기만 하면 된다. 아, 한 가지 빠트릴 뻔했다. 연애의 장점은 그 과정만으로도 인간을 성숙시킨다는 것이 아닐까. 글쓰기도 그렇다. 일단 쓰시라. 그러면 삶은 다른 옷을 입고 당신 앞에 나타날 것이다. 때로는 따귀를 날려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도 다 성숙의 길이 아니겠는가.
문장의 생명은 ‘진실’
지난 달에 낸 내 책의 부제가 ‘바른 세상을 갈망하는 마음’이었다.
사실은 ‘마음’대신 ‘순정’이란 말을 쓰고 싶었다.
한승헌(변호사)
“나도 글을 잘 쓸 수 있다.”
이런 제목을 놓고 글을 쓸 처지는 아니다. 한번도 내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의 청탁에 고사(固辭)를 관철하지 못한 책임을 다하는 뜻에서 어설픈 체험 고백으로 지면을 채우고자 한다.
나는 학생 때 현상 논문 모집에 응모한 적이 있다. 고3 때던가, 당시 미국공보원(USIS)에서 ‘국제연합(UN)과 한국’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현상 모집을 했던 것이다. 한국동란 후 10월24일을 ‘유엔(UN) 데이’로 정하고 공휴일로까지 삼던 시절이었다. 그때 요행히 당선되어 미제 라디오 한 대를 상품으로 받았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다.
대학 1학년 때는 인권주간을 기념하는 인권옹호 논문 현상에 응모했다가 역시 용케도 당선이 되어 상당액의 상금을 탔다.
이렇게 쓰다보니, 내가 소시 적부터 무슨 작문 소질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비쳤는지 모르겠으나, 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두 번 다 현상으로 내건 상품과 상금이 욕심 나서 만용을 부려본 터였다. 실인즉, 6·25 전란으로 몹시 피폐했던 때인지라, 가난한 학생의 공부방에 라디오가 없었는가 하면, 학교생활 안팎에서 진 빚을 갚아야 할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상품과 상금이라는 잿밥에 끌려 글을 썼고, 그 점에서 나는 조숙한 ‘프로’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탄생 비화를 가진 내 글이 신문에 연재되었을 때의 기분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그 후로 나는 본래 지망과는 달리 법조인이 되었고, 1960년대 이후의 군사독재 시대에 정치범 내지 양심수들의 변호에 매달리면서 얼마쯤 저항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다 보니 사건 변호의 필요에 끌려, 또는 언론의 청탁이나 민주화운동단체의 요청에 못 이겨 부역 잡히는 식으로 이것저것 글을 쓰게 되었다.
얼마쯤의 찬사가 있었는가 하면, 반공법 올무에 걸려 징역 살고 변호사 자격까지도 박탈당하는 필화도 겪었다.
나는 법조인이기에 우선 법률문제를 중심으로 한 논증(論證) 위주의 문장을 써야 했다. 변론서나 준비서면 등 재판 문서의 작성이 일상화되어 있는데다가 청탁 원고도 대개 법률 분야 내지 시론적인 내용이 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법률 문장은 딱딱하고 난삽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전문(법률)용어의 풀어쓰기에도 한계가 있다. 논리에 얽매이다 보니 장황해지기도 한다. 이런 난점을 극복해보려고 노력은 해보았지만 그 성과는 미지수다.
감사원에서 일할 때에는 감사문장 바로 쓰기 교육을 했다. 감사문장도 법률문장에 준하는 터여서 일반이 이해하기는 적지 아니 어렵다.
또한 A4 용지 한 장을 다 읽어도 ‘다’자는 안 보이고, ‘고’자와 ‘며’자만 나온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외부 전문가들을 모셔다가 하루 4시간씩 나흘 동안 특강을 받았다. 그에 뒤이은 직원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감사문장편람’을 만들어 실무에 활용토록 했다.
글은 되도록 간명하고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쓰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표현의 민주화’를 실천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과제라고 믿는다. 더구나 전문성이 엷어도 되는 경우에는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도 쉽게 써야 한다.
흔히 ‘좋은 글’이라면 내용 위주로 생각하고, ‘글을 잘 쓴다’고 하면 표현력을 연상하는데, 욕심으로야 그 두 가지를 다 갖추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시킬 만한 표현이 부족하다거나, 내용은 좋지 않은데 글의 기교만 현란하다면 그 어느 것이나 바람직하지 못하다. 위의 두 가지 요소를 겸비하자면 많은 독서와 꾸준한 글쓰기 외에 달리 왕도(王道)는 없다.
글의 생명은 진실에 있다. 내용도 표현도 진실에서 벗어나면 공감을 얻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얼마나 글을 잘 쓰는가. “야구해설자가 반드시 야구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변명을 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거짓, 과장, 술수로서의 글쓰기만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지난 달에 낸 내 책의 제목이 ‘법이 있는 풍경’인데, 거기 붙인 부제가 ‘바른 세상을 갈망하는 마음’이었다. 사실은 ‘마음’ 대신 ‘순정’이란 말을 쓰고 싶었다. 비록 서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을 향한 간절한 ‘순정 고백’으로 나는 글을 써왔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