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란 겉보기처럼 단순하지 않다.
물건을 사서 얼마간의 이윤을 붙여 파는 것이 장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막상 뛰어들고 보니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이제껏 돈 주고 사기만 하던 나다. 상인의 이익을 당연시해 값이 좀 비싸도 깎는 것을 비신사적인 행동으로 여겼다. 그런 내가 원가에 이익을 붙여 판다는 것이 심부름 갔다오면서 웃돈을 얹는 것 같아 꼭 들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주에서 이런 소매업을 하려면 몇 가지 매너를 몸에 익혀야 한다. 점포에 들어서면 “굿 모닝” “굿 애프터 눈” 등은 기본이고 거스름돈을 내줄 때는 물건값에 잔돈부터 더해가며 손님이 내민 액수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거스름돈을 다 받은 손님을 응시하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윙크로 어색함을 넘긴다. 이런 시선의 맞부딪침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쑥스러워 고개 숙이고 우물쭈물하다간 자기에게 관심 없는 것으로 간주해 매우 불쾌하게 여긴다.
내 가족의 생계가 이 장사에 달렸다고 생각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장사꾼다운 이력이 붙었다. 감히 말하거니와 전기 기계 엔지니어에서 구내 매점 아저씨로 바뀌는 데도 복잡한 전기회로 공부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매점에도 진열품이 자그마치 500여 종류나 된다. 거기에 드라이클리닝까지. 여기 사람들은 어른들도 군것질을 즐긴다. 자기가 찾는 게 없으면 곧장 옆가게로 간다. 똑같은 상품을 놓고 한 지붕 아래서 통로를 사이로 네 개의 상점이 갈라 먹는 장사다. 따라서 친절과 좋은 매너가 아니면 손님을 끌 수 없다. 더구나 다른 상점 주인들은 서구식 매너가 몸에 밴 서양인이었고 나 혼자만 동양인이다.
나는 한번 찾아온 손님은 특징을 메모해 두었다가 다음 번에 정확히 이름을 불러 단골로 만들었다. 가령 ‘키 크고 쇼트 커트에 금발은 제니이고 그녀는 아몬드 초콜릿을 좋아한다’ 이런 식으로.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열한 시간이나 일했지만 내 생활은 점차 활기를 되찾았다. 규칙적인 일과로 좁은 공간의 지루함을 잊으며.
호주는 계약 사회다. 170여 민족이 모인 다민족 국가에서 동일 사물에 대한 판단기준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소한 것도 문서화된 계약으로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엄청난 분쟁이 발생한다. 개인의 경험이나 상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가 아니다.
나는 사글세 6개월 계약하는데도 조항이 9장이나 되는 작은 글씨를 검토했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거기엔 정원수 관리, 벽에 박을 수 있는 못의 수, 페인트 얼룩 등 별별 시시콜콜한 조항이 다 담겨 있었다. 물론 임차인으로서 계약을 위반하면 변상한다는 조건으로.
날린 청소 권리금을 교훈 삼아 칼텍스 구내 매점은 변호사를 통해 처리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나 다시 연장하려 하자 건물 매각으로 불가능하다는 통보가 왔다.
1957년 보험회사 AMP는 시드니에서 가장 높은 15층 건물을 완공해 칼텍스에 40년간 임대를 주었다. 그런데 그 임대 완료를 앞두고 건물 주인이 바뀐 것이다. 따라서 권리금을 주었던 1층 소매상 네 개는 점포를 비워야 했다.
나는 칼텍스 임대 계약이 97년에 끝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 주인은 칼텍스 같은 다국적 대기업은 재계약할 것이 분명하다는 거였다. 물론 나도 날로 사세가 확장되는 한국의 대형 정유회사에 대한 선입관으로 그러리라 믿었다. 계약서에도 분명히 3년의 계약과 3년의 연장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입주해 한 달이 지나서 안 사실이지만 매도 매수자와의 계약서 외에 건물주의 허가서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처음 해보는 이런 매매에서 허가서가 따로 있음을 알고 거기서 임대기간의 상이점을 발견하기는 나로서는 무리였다.
나는 이 일로 담당 변호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위한 재판을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변호사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 내가 소비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이 배상액을 넘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11만 5000달러를 주고 산 고생
한 푼 보상도 없이 쫓겨나는 것이 확실해지면서부터 사람 만나기를 꺼리게 됐다. 이미 칼텍스 건물 매각과 용도 변경이 매스컴을 통해 호주 전역에 보도되던 터였다. 그래서 위로전화도 가끔씩 걸려왔다.
‘자식 혼자 잘난 척하고 설쳐대더니…. 그것 봐라. 누군 너만 못해서 잠자코 있는 줄 아니?’ 설마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이런 말이 어느 곳에서 한 입 건너 보태지고 부풀려 안주로 오르내릴 것만 같았다.
사실 내가 4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골프나 낚시로 소일했더라면 분명히 은행 잔고가 더 남았을 거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놀고 먹는 게 남는 거’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내가 증명해 보인 셈이다.
그러나 비록 애태움 속에 그 많은 권리금을 소리 없이 날렸지만 값진 수확도 있었다.
사업 매매 계약에 대한 과정과 법률 용어를 막힘 없이 읽을 수 있고 수많은 물류를 훤히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자랑삼아 말하거니와 시드니에서 상점의 위치와 진열품만 보고도 매상과 순익을 나만큼 정확히 알아 맞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다.
나는 햄버거 하나 사먹는 것도 아까워하고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서 집에 와 밥 한 그릇으로 때운다. 이런 내가 11만 5000달러나 되는 수업료를 지불했다는 것은 분명히 깊은 상처다. 그러나 나는 이왕 비싸게 산 고생이니 이걸 밑바탕으로 한 발씩 전진해야 이민의 새 삶을 개척할 수 있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바닥부터 기어야 한다는 각오로 청소를 시작했고, 물류를 배우고자 구내 매점을 운영했다. 한꺼번에 청소원 둘이 예고도 없이 그만둬 자정을 넘어서까지 쉬지 않고 카펫을 문지르고 변기를 닦는 일을 일주일간 계속하자 코피가 터졌다. 그때마다 호주에 적응하기 위한 정신과 육체의 수련일 뿐이라고 위로하며 넘겼다.
바닥부터 기지 않고 처음부터 번듯하게 뛰어들어 실패한 사람들을 얼마나 보아왔는가. 이 얼마나 비싸게 주고 산 고생인가!
나에게는 폭풍 속에서 철판을 사이로 죽음의 위협을 견뎌낸 바다 사나이의 의지도 있다. 호주는 적어도 균등한 기회의 사회다. 이것저것 실패하면 네 식구 손잡고 하버브리지에서 떨어져 죽을 것은 상상했어도 한국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한번도 떠올린 적이 없다.
이런 곳에서 버텨내지 못한 생존의 낙오자가 학연 지연 혈연이 카스트제도로 화석이 된 한국에 어떻게 합류할 수 있겠는가?
남은 달걀을 모두 한 광주리에 담아들고
칼텍스는 96년 7월까지 철수하라는 최종 통보를 보내왔다. 벌써 1년 전부터 세든 소규모 회사들이 이사 가고 은행마저 옆건물로 옮겨 장사는 썰렁했다.
매주 금요일엔 존이 초콜릿을 주문받으러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렇게 일주일 내내 시드니 중심가를 도는 일을 25년이나 펭귄 걸음으로 뒤뚱거리며 해왔다. 그 정도 이력이라면 소매업 사정에 통달했을 것 같아 어느 날 물었다.
“네 고객 중에 어느 상점이 불황 없이 장사가 잘 되니?”
“그야 단연 서큘라키 뉴스에이전시다.”
“그럼 주인에게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렴.”
딱히 사겠다는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니다. 빈손으로 쫓겨나는 딱함을 동정하기에 이까짓 것 정도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허세를 부려본 거다. 이 불경기에 장사 잘 되는 상점을 어느 바보가 팔 것인가.
그러나 다음주 존은 뜻밖의 소식을 전해 왔다. 팔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함정이 있거나 바가지를 쓸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주인은 신경질적인 인상에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부터 이런 소매업에 종사한 그리스인이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퍼부어대는 그의 말 속에서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서큘라키 40여 개 상점은 95년부터 철거 대상이다. 따라서 정책이 결정돼 통보하면 6개월 이내에 철거해야 한다.
둘째, 그는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한 자신의 위대함을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한다.
서큘라키를 관통하는 시내 순환선과 이중 고가도로는 40년 전 임시로 건설되었다. 그것이 시드니항의 미관을 해친다 하여 올림픽을 앞두고 철거 도마에 오른 것이다. 내가 그 가게를 사기 위해선 과연 실제로 철거될 것인가, 턱없이 요구하는 권리금을 어떻게 내 자금에 맞추어 깎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나는 철거 가능성에 대해 여러 채널을 통해 조사했다. 그 결과 지질학적으로 난공사고 기존 노선 높이에서 지하로 연결되기엔 거리가 짧아 급경사라는 것이다. 또 하나 하루 3만2000대가 이용하는 고가도로를 우회도로도 만들기 전에 철거하기란 대단히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다.
문제는 권리금이었다. 그리스 주인은 철거 대상인 주제에 현 시세에다 프리미엄을 얹으려 했고, 나는 철거에 불안해진 그가 빈손 터는 것보다 얼마간 유리한 헐값에 팔고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동상이몽 속에 흥정이 오갔을 뿐이었다.
나는 배달민족의 피에는 은근과 끈기의 역사성이 있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것이 언제부터 빨리빨리로 변질돼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참사로 이어졌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나는 은근과 끈기라는 말을 무척 좋아한다.
나는 차돌멩이 주인과 권리금을 깎기 위한 장기적인 싸움에 돌입했다. 만날 때마다 자수성가한 위대함을 침이 마르게 추켜세웠고 당장이라도 계약할 듯하다가 트집을 잡고 한발 물러섰다.
그도 멀쩡한 상점에 부나방처럼 제 발로 찾아와 사겠다고 흥정을 자청하는 나를 바보로 알고 임대계약서에 장난을 쳐 내 전 재산을 노리려는 음모도 서슴지 않았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95년 2월 초 오페라 하우스 근처의 서큘라키 뉴스에이전시를 인수하였다. 흥정을 시작한 후 만 2년의 세월이 흘렀고 호가에서 7만 달러를 깎은 가격으로. 나는 이 매매 과정에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 호주에선 서두르면 서두른 만큼 손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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