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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점령한 일본열도

만화가 점령한 일본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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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예가 하나 있다. 1946년 ‘후쿠니치 신문’(오늘날의 아사히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단행본 68권이 출간되고 28년간 일요일 저녁 시간에 TV에 방영된 최장수 연재만화 ‘사자에상’과 관련된 출판물이다. 90년대 중반에 아마추어 연구모임인 도쿄 사자에상 연구회가 사자에상의 역사성을 분석한 연구논문 ‘이소노가(家)의 수수께끼’를 펴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자그마치 25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평범한 가정주부 사자에상이 꾸려나가는 이소노집안 사람들이 여지껏 살아온 삶이나 복장을 살펴보면, 파란만장했던 일본 현대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 책을 사본 주 독자층은 중년 이상의 지긋한 노년 세대였다. 이는 일본의 만화 독자층 가운데는 ‘실버 독자층’도 넓게 형성되어 있다는 증거다.

도쿄 지하철은 승객들의 독서 열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실상 지하철 승객들이 보는 책은 70% 이상이 만화책이다. 실제로 도쿄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면 멀쩡하게 신사복을 차려입은 회사원들이 만화책을 읽고 있는 광경을 매번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사적이다. 이들이야말로 2차세계대전 패전 직후인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베이비붐을 타고서 태어나 굶주림 속에서 ‘철완 아톰’ ‘정글 대제’ ‘리본의 기사’ ‘거인의 별’ ‘내일의 조’를 읽으며 자란 사람들이다. 이들은 만화를 읽으며 일본 재건과 과학 입국이라는 꿈과 근성을 키운 이른바 ‘단카이(團塊) 세대’다.

실제로 일본 만화사를 살펴봐도 이들이 18세에서 20세가 될 무렵인 1965년에는 ‘빅코믹’이라는 청소년잡지가 창간되었다. 성인이 될 무렵에는 각종 주간지가 나왔다. 이들은 대학시절에 ‘한손에는 만화잡지, 다른 한손에는 마르크스’를 쥐고 지냈던 전공투 세대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 지도층이 된 이들이 한손에는 만화책, 다른 한손에는 전문서적을 들고 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반 대중도 이처럼 만화와 친숙한 세대로 성장했지만, 이중에서도 유별나게 만화에 집착하는 이들은 이른바 ‘오타쿠’(굳이 번역하자면 애니메이션과 게임에 미친 사람들)로 성장했다. 이들은 열렬한 SF팬이었는데, 그중 일부가 ‘스튜디오 누에’라는 오타쿠 계열의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직하여,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모든 오타쿠들의 동경 대상이었다.



오타쿠의 출현

오타쿠의 대부격인 토시오 오카다씨는 이 오타쿠들은 TV가 보급되면서, 그것도 비디오 데크가 발매된 이후 생긴 새로운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말하자면 영상에 대한 감수성을 크게 진화시킨 시각적 인간이 오타쿠라는 것이다. 토시오 오카다씨에 따르면 이 오타쿠들은 미디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니 이들의 관심은 애니메이션에서 게임으로, 특수촬영 영화로, 영화로, 소설로, 뮤지컬로 넘나드는 것이다.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을 주도하는 이들은 바로 이 오타쿠들이다.

만화와 친숙한 대중, 소수의 오타쿠. 이들이 있기에 일본은 만화가 모든 문화 위에 군림하고 있다.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산케이’ 등 일본의 유수 신문들도 만화 월평과 만화 관련 시리즈물을 꼬박꼬박 싣고 있다. 하루 발행 부수가 1000만부나 되는 ‘요미우리’는 만평 게재에서 한걸음 더 나가 매년 초에 만화가를 대상으로 카툰 대회를 열고 있다.

일본은 초·중·고·대학마다 만화동아리가 있다. 4년제 대학에는 만화학과가 있고, 1년 과정의 만화전문학원도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만화가 예비군 집단이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다. 이들이 모두 만화가 지망생이고, 만화 산업으로 뛰어든다.

뿐만 아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철완 아톰’ 같은 만화가 실렸고, 일본 만화 발달사가 근대사 교과서에 소개되기도 했다. 국민의 만화 사랑이 이처럼 높으니 정부도 만화를 이용한 각종 홍보 출판물을 내고 있다.

만화는 일본에서 스포츠 문화를 이끌고 있다. 일본은 90년대 초반까지 축구 후진국이었다. 당연히 축구에 대한 관심도 적었다. 그런데 1993년 J리그를 시작하고 월드컵까지 유치하며 축구붐을 일으켰다. 청소년을 축구 강국에 유학보내는 등 노력을 기울여 최근에는 한국 축구를 넘어서서 아시아 축구 정상에 올라섰다.

여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 만화였다. 1983년 첫방영을 시작한 이래 폭발적 인기를 끈 다카하시 유이치의 ‘캡틴 쯔바사(날개)’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축구왕 슛돌이’같은 유의 축구 만화들이다. 이 일본 축구 만화들의 줄거리는 한결같다. 일본 축구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일본 축구 꿈나무들이 어린 나이에 남미와 유럽 축구 선진국으로 축구유학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은 뒤에 기량을 높인 뒤 귀국해 일본 축구를 세계 정상으로 끌고 간다는 식이다.

축구 뿐만 아니다. ‘슬램 덩크’라는 농구 만화도 마찬가지다. 이 만화는 일본 전역에 대대적인 농구 붐을 일으켰다. ‘슬램 덩크’는 농구 자체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 사이에서 헐렁한 상의와 긴 팬티, 농구화로 대표되는 농구패션 붐까지 일으켰다. 농구 열기는 청소년 뿐만 아니라 직장인에게까지 번져 길거리 농구 같은 문화를 만들어냈다. 만화 한편이 일본에서 외면받던 농구를 대번에 일본인의 사회체육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현상은 ‘슬램 덩크’가 한국으로 수입된 이후 한국 청소년으로까지 이어졌다.

모든 문화 위에 군림하는 만화

만화 파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만화는 다른 장르의 문화까지도 몽땅 만화화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만화를 영화나 TV드라마로 만들거나 소설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게임으로, 퀴즈로 만드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한 예로 1992년 10월부터 ‘주간소년 매거진’에 연재된 ‘가네다이치(金田一)소년의 사건부(事件簿)’라는 소년 탐정추리만화는 13권의 단행본으로 나와 판매부수 2500만 부를 기록했다. 또 1995년 여름에는 TV주간 드라마로 방영되어 평균 23.2%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만화를 소설로 개작하는 작업도 왕성하다.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은하철도 999’ ‘우주전함 야마토’ ‘루팡 3세’ 같은 히트 만화들이 만화 소설책으로 나와 인기를 끌었다. 만화의 연극화, 뮤지컬화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공연에는 만화 주인공 분장을 한 배우들이 출연한다.

만화침투현상은 일본의 모든 대중 문화에 예외없이 진행되고 있다. 일본 문화 평론가들은 이런 현상을 ‘만화 기원(起源) 현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화기원현상은 일본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이미 국제사회에서 일본 만화는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에 버금가는 국제 대중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미국, 홍콩의 영화프로덕션도 ‘스트리트 파이터’ ‘슈퍼 마리오’ ‘파워 레인저’ ‘가면 라이더’ ‘시티 헌터’ ‘배틀 컴뱃’ ‘크라잉 프리맨’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전자오락 게임을 영화로 만들어 히트시키고 있다. 여기에 전세계 안방극장의 3분의2를 장악하고 있는 TV용 애니메이션과 세계시장의 9할을 차지하는 전자오락 게임 소프트웨어까지 합치면 일본 만화 파워가 얼마나 큰 힘으로 지구촌 대중문화를 강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신동아 200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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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 cy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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