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권5 대성(大成)이 2세 부모에게 효를 하다’라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량리(牟梁里, 浮雲村이라고도 한다)의 가난한 여자인 경조(慶祖)에게 아들이 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넓어 성과 같으므로 그로 인해서 대성(大城)이라 이름지었다. 집안이 가난해서 살아갈 수 없으므로 지주인 복안(福安)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니 그 집에서는 소작논 몇 마지기로 의식을 해결하게 하였다.
어느 때 점개(漸開)라는 승려가 흥륜사(興輪寺)에서 육륜회(六輪會)를 베풀고자 하여 복안의 집으로 시주를 권하러 왔다. 베 50필을 시주하니 점개가 축원하여 말하기를 ‘단월은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天神)이 항상 보호하여 지키고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을 것이며 편안하고 즐거우며 수명이 길 것입니다’ 한다.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 들어와 그 어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문에서 승려가 외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을 수 있다 합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정녕 전생에 착한 일을 한 것이 없어서 이렇게 곤궁한 모양입니다.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가난할 터이니 내가 소작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뒷날의 보답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미도 좋다고 하여 점개에게 밭을 시주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대성이 죽었다. 이날 밤 나라의 대상(大相; 큰 재상)인 김문량(金文亮) 집에는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이제 네 집에 태어난다.’ 집안 사람들이 놀라서 모량리를 찾아가 보게 하니 대성이 과연 죽었고 그날 외침이 있던 것과 같은 때였다. 임신이 되어 아이를 낳았는데 왼쪽 손을 꼭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여는데 금간자(金簡子; 금으로 만든 조각판)가 있고 대성(大城)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대성이라 이름짓고 그 어머니를 맞이해다 집안에서 아이를 함께 기르게 하였다.
장성하고 나자 사냥을 좋아하여 하루는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았다. 산 아래 마을에서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이렇게 따진다. ‘네가 어째서 나를 죽였느냐. 나도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겁에 질려 용서를 청하니 귀신이 이렇게 말한다. ‘능히 나를 위해서 절을 지어줄 수 있겠느냐.’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에서 깨어나니 땀으로 이불과 요가 모두 젖었다.
이로부터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하여 그 잡았던 곳에 장수사(長壽寺)를 지었다. 이 일로 인해서 마음속으로 느낀 바가 있어 자비와 서원(誓願)이 더욱 독실해졌다. 이에 현생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창건하여 신림(神琳)과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해다 각각 머물러 살게 했다. 성대하게 상설(像說; 불보살상과 불사에 필요한 각종 설비)을 베풀어서 또 길러준 노고에 보답하니 한 몸으로 2세(世) 부모에게 효도를 한 것이다. 예전에도 듣기 어려웠던 일이니 보시를 잘한 영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차 석불을 새기려고 큰 돌 하나를 쪼아서 감실 뚜껑을 만들었더니 돌이 홀연 세 쪽으로 갈라졌다. 분하고 성이 나서 자는 척하고 있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서 조성(造成)을 마쳐놓고 돌아간다. 대성이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남쪽 잿마루로 달려 올라가서 향을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곳을 향령(香嶺)이라 한다. 그 불국사의 구름다리와 석탑에서 돌과 나무에 조각해 새긴 공이 동부 여러 사찰로서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옛날 시골에서 전해오는 얘기책에 실린 것은 이와 같으나 절에 있는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덕왕대 대상(大相; 큰 재상) 대성(大城)이 천보(天寶) 10년(751, 경덕왕 10년) 신묘에 불국사 창건을 시작했으나 혜공왕대를 지나 대력(大曆) 9년(774, 혜공왕 10년) 12월2일에 대성이 돌아감으로써 이에 국가가 이를 끝마쳐 이루어냈다.
처음에 유가(瑜伽) 대덕(大德)을 청해다가 마군(魔軍)을 항복받고 이 절에 머물게 했다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 계속하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얘기와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일연(一然, 1206~1289년)이 ‘삼국유사’를 완성하던 때인 충렬왕 6년(1280) 전후한 시기에도 이미 불국사의 사적기(事蹟記)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향전(鄕傳)에 실린 고담(古談)을 채록하고 그 말미에 사중기(寺中記) 한 토막을 실은 다음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고 있다.
사중기(寺中記; 절에 있는 기록)가 얼마만큼 자세한 내용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향전에 실린 고담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기에 일연이 오히려 향전의 고담 내용을 전면 채록하고 나서 그와 다른 내용만 한 토막 실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애당초 불국사의 사적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그 창건시말을 이런 고담 형태의 전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과 같은 경우 일연이 직접 종명을 읽고 그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한 것은 현존한 종명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국사는 무언가 애매모호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중기’ 내용에서 대강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천보 10년(751)에 불국사 창건을 시작했으나 혜공왕(765~780년) 시대를 지나 대력 9년(774) 12월2일에 대성이 돌아감으로 이에 국가가 이를 끝마쳐 이루어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대력 9년이 혜공왕 시대 이후라고 착각하고 쓴 내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는 혜공왕 시대에도 불국사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후 원성왕(元聖王, 785~798년) 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 원성왕릉인 (도판 2)이 바로 불국사 아래 토함산 산자락 끝에 있기 때문이다.
원성왕이 불국사 창건 시말을 분명히 밝혀 놓기를 꺼렸던 것은 바로 원성왕 자신이 성덕왕과 경덕왕의 혈통을 단절시키고 새 왕조나 다름없는 하대(下代) 왕조를 열어간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원성왕이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면 어째서 원성왕이 불국사 창건 시말을 밝히려 하지 않았는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겠기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관계 기록 중 일부를 옮겨 보겠다.
‘삼국사기’ 권10 원성왕 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성왕이 서다. 휘(諱; 임금의 이름은 감추고 부르지 않는 것이므로 임금의 이름자는 휘라고 부른다)는 경신(敬信)이고 내물왕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朴)씨 계오(繼烏) 부인이고 왕비는 김씨이니 신술(神術) 각간의 따님이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반신(叛臣; 반역하는 신하)이 발호(跋扈; 제멋대로 날뜀)하자 선덕왕(宣德王, 金良相)이 그때 상대등이 되어 임금 곁의 악인들을 제거하자고 먼저 부르짖었다. 경신도 이에 참여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으니 선덕왕이 즉위하자 곧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자 군신들이 뒤이을 일을 의논하고 왕의 조카인 주원(周元)을 세우자고 했다.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밖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임금자리라는 것은 큰 자리라서 진실로 사람이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폭우가 하늘에서 쏟아지니 혹시 주원을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인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아우로 본디 덕망이 높아 임금의 자격이 있다.’ 이에 뭇사람들의 의논이 일치하여 세워서 자리를 잇게 하니 끝나고 나자 비가 그쳤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에 고조인 대아찬 법선(法宣)을 추봉(追封)하여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하고, 증조인 이찬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하며 조부인 이찬 위문(魏文)을 흥평(興平)대왕으로 하고 부친인 일길찬 효양(孝讓)을 명덕(明德)대왕으로 했다. 어머니 박씨는 소문태후(昭文太后)로 하고 아들인 인겸(仁謙)을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 개성(開聖)대왕 2묘(廟)를 헐고 시조대왕(始祖大王, 내물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조부인 흥평대왕과 부친인 명덕대왕으로 5묘를 삼았다.”
‘삼국유사’ 권2 원성대왕(元聖大王)조에는 이런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기술해 놓고 있다.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상재(上宰; 최고위 재상)가 되고 (원성)왕이 각간이 되니 두 번째 재상 자리에 있었다. 꿈을 꾸니 복두(頭, 벼슬아치들이 쓰는 관)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깨어나서 점을 치게 하니 이렇게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실직할 조짐이고 가야금을 잡은 것은 큰 칼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들어갈 조짐입니다.’ 왕이 듣고 몹시 걱정이 되어 두문불출(杜門不出; 문을 닫고 나다니지 않음)하고 있는데 그때에 아찬 여삼(餘三; 어떤 본에는 餘山이라고도 함)이 찾아와서 만나기를 청한다. 왕이 병을 핑계 대고 나가지 않자 다시 청하기를 한 번 보기만 하자고 한다.
왕이 허락하자 아찬이 이렇게 말한다. ‘공이 꺼리는 것이 무슨 일입니까.’ 왕이 꿈을 점친 일을 모두 얘기하니 아찬이 일어나 절하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길하고 상서로운 꿈입니다. 공이 만약 대위(大位; 임금자리)에 올라서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풀어드리겠습니다.’
왕이 좌우를 물리치고 풀기를 청하니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두를 벗는다는 것은 사람이 윗자리에 없음이고 흰 갓을 쓴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며 열두 줄 가야금은 12손이 대를 물릴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중으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왕이 이르기를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에 오를 수 있겠는가.’ 아찬이 이르기를 ‘북천(北川; 閼川의 다른 이름) 신(神)에 가 몰래 제사지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좇았더니 얼마 안 되어 선덕왕이 돌아가고 나라 사람들이 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아 궁으로 맞이해 들이려 했다.
(주원의) 집이 내의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 없자 왕이 먼저 궁으로 들어가 즉위하니 상재(上宰, 김주원)의 무리가 모두 와서 이에 붙좇고 새로 등극한 임금께 절하며 축하했다.
이가 원성대왕이다. 휘는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이니 대개 꿈의 보응을 두텁게 받은 것이다. 주원은 명주(溟洲, 지금 강릉)로 물러나 살았고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 자손을 불러다 벼슬을 주었다.(중략)
화엄불국세계를 구현한 토함산의 석굴암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동(西洞; 서쪽 골짜기) 곡사(鵠寺; 崇福寺의 옛이름)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碑)가 있다.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창건했다. 조부인 훈입(訓入) 잡간(干; 신라 관등 제3위)을 추봉하여 흥평(興平)대왕으로 삼고 증조인 의관(義官) 잡간을 신영(神英)대왕으로 삼았으며 고조인 법선(法宣) 대아간(大阿干; 제5위)을 현성(玄聖)대왕으로 삼았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이로 보면 원성왕은, 경덕왕의 아들이며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 자립한 후에는 경덕왕은 물론 성덕왕의 사당까지 허물고 자신의 조부와 부친의 사당을 대신 세워 새 왕조의 개창을 표방한 것을 알 수 있다. 성덕왕과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왕조, 즉 진흥왕의 혈통을 이은 순수 진골 왕통과의 단절을 표방했으니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건립해온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원성왕 자신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사실을 공표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니 불국사 건립을 마무리지은 원성왕은 이를 공사 감독관으로 건립의 총책임을 맡았던 김대성 개인의 원찰로 둔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김대성이 양대 부모를 위해 그 추복사찰로 지은 것처럼 선전하여 민간에 그 얘기가 퍼지도록 하고 창건시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인멸시켜간 듯하다.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지은 사실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왕릉 자리를 그 불국사가 바라다보이는 토함산 끝자락에 써서 불국사가 마치 자신의 원찰인 듯 착각하게 했다. 그 결과 신라불국토 사상을 표방하기 위해 토함산에 화엄불국세계를 구현해 낸 불국사와 석굴암의 정확한 창건 시말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려 오늘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백인 백설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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