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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국물’에서 ‘JSA 공동정사구역’까지

‘용의 국물’에서 ‘JSA 공동정사구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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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의 초창기만 해도 제목은 나름대로 내용을 반영하는 데 충실했다. B급 영화의 메이저 업체들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제목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반영하려 노력했다. ‘빨간 보자기’나 ‘용의 국물’을 보면 ‘왜 제목이 그렇게 정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잠시뿐이었다. 에로 비디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영세한 군소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이때부터 성인 비디오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누가 먼저 대중의 시선을 뺏느냐는 싸움으로 치달았다. 제목 경쟁이 전보다 훨씬 뜨거워졌음은 당연한 결과다.

더욱 노골적인 스틸 사진과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 비디오 테이프의 케이스를 장식했다. 유명 영화 제목을 패러디하는 것은 기대 이상의 연상효과를 낳았고, 그것을 알아차린 제작사들은 아이디어 경쟁이라도 하듯 기상천외한 제목들을 앞다퉈 내놓았다.

패러디에도 몇 가지 틀이 있다. 우선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유명 개봉관 상영작들의 제목을 그대로 빌려 오는 것이다.

‘털밑썸씽’, ‘JSA(Joint Sex Area) 공동정사구역’,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하리’, ‘여탕을 털어라’, ‘짜장면 배달부는 벨을 두 번 누른다’, ‘쇼킹 에로배우’, ‘주재소 습격사건’, ‘구멍가게 습격사건’, ‘첫 번째 구멍’, ‘박하사랑’, ‘모텔 성인장’, ‘처녀들의 야참’, ‘빨강 머리’, ‘박히면 죽는다’, ‘내게 욕을 해봐’, ‘반칙여왕’, ‘변태왕’, ‘미아리 정육점’, ‘먹거나 혹은 먹히거나’, ‘감각의 왕국’, ‘감각의 계곡’, ‘연어’, ‘인정사정 보지 마라’, ‘딸딸이 일병 구하기’, ‘접촉’ 등.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굳이 원전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 만한 것들이 셀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하는 비디오 영화의 신세를 한풀이하듯, 아니면 조롱이라도 하듯 걷잡을 수 없이 출시됐다.

또 다른 형식이 유명 방송 프로그램을 본뜬 것이다.

‘FD 수첩’, ‘꼬꼬마 에로토비’, ‘변태보감’, ‘부부생활 동의보감’, ‘그것을 알려주마’, ‘왕초2’, ‘신혼여행 특공대’, ‘섹스파일’, ‘69쇼핑 신장개업’, ‘섹스 매거진 2782580’, ‘셀프 카메라’ 등.

이 밖에도 유명 영화잡지에서 따온 ‘쎄네 21’, 만화 제목에서 빌려온 ‘광순 생각’까지 있었다.

최근에는 사회상을 반영하거나 유행어, CF의 유명 카피를 이용한 제목들도 나왔다.

‘투명 팬티 로비사건’, ‘탈옥녀 신창순’, ‘벤처제비’, ‘날 물로 보지마’, ‘원조교제’, ‘선영아 사랑해’, ‘나는 18년이다’, ‘20세 찌찌엘’ 등 나름대로 사회를 비꼬거나 유행어를 등장시킨 제목들이 비디오 대여점 한 귀퉁이에 포진하고 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힌트를 얻은 ‘메딕 처녀 알몸 러쉬’도 있다. 게임에서 유일한 지구인으로 등장하는 안 테란 족. 그 가운데 메딕은 병사들을 치료하는 여자 위생병이라는 것이 힌트가 됐다. ‘러쉬’는 말 그대로 적진(혹은 남자들)을 향해 ‘돌진’하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포르노물이 범람하면서 ‘그늘 속의 비디오’들이 대거 시장에 등장했다. ‘K양의 비디오’를 시작으로 몰래카메라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여대생 졸업 누드앨범’, ‘공중화장실’, ‘몰카 자유학원’, ‘여학생 기숙사’, ‘포르노 출장카메라’ 등이 그것이다. 이미 패러디의 고전이 된 ‘빨간 보자기’도 여기에 속한다.

패러디 제목의 규칙은 단어의 변형이다. 하지만 그 바뀐 단어들은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노골적이다. 원본의 명성을 비집고 들어가 나름대로 영화의 ‘진한’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패러디 시대 이전의 제목들이 상상을 요구했다면, 패러디된 제목들은 즉흥적인 웃음과 자극을 준다. 상상의 시간을 준다는 것은 곧 다른 비디오물에 한눈 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패러디 제목들을 대할 때 많은 사람들은 ‘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현실은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영상물 등급위원회의 한 관계자는“패러디 제목이 문제가 돼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표절 시비가 붙고 저작권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이것은 오로지 당사자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표절로 인해 저작권이 침해됐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법이나 관계기관에 호소하지 않는 한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제목을 패러디한 작품의 경우 실제 영화에서 제목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비슷비슷한 내용을 찍어둔 상태에서 출시 전 제목을 결정하는 관행이 자리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여러 작품을 창고에 쌓아두고 극장가의 동향을 살피다가 신작을 출시하는 얌체족도 있다. 개봉 직후의 영화를 패러디한 제목일수록 비디오를 고르는 소비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극장에 걸려 있는 영화의 패러디 작품을 볼 경우 재미있는 제목이란 생각과 함께 ‘아니 벌써’라는 감탄까지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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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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