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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파는 다빈치 에어컨 파는 피카소

광고 속의 미술 이야기

아파트 파는 다빈치 에어컨 파는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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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계층을 겨냥하는 광고일수록 미술작품을 교묘하게 활용한다. 한 신문사가 이용한 앙리 루소의 작품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나이브 아트의 대가인 앙리 루소의 작품 ‘꿈’은 정보기술로 무장한 개인주의자들인 신귀족의 삶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이미지다. 소비와 여행은 신귀족의 꿈이자 생활 패턴이 된 지 오래다. 이른바 자유직업을 가진 이들은 왕성한 소비력을 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문화적 교양 역시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모나리자’나 밀레의 ‘만종’ 같은 ‘낡은’ 그림들이 통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에게는 어쭙잖은 패러디도 큰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이들은 앙리 루소의 그림을 본 적이 있거나 아니면 미술의 추상화 물결이 태동하던 당시의 아방가르드한 분위기에 찬동하는 개방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다.

한 가전업체의 에어컨 광고가 이러한 예에 속한다. 하지만 이 광고는 일반인을 상대로 한 광고치고는 너무 난해하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아비뇽이 프랑스 도시인 줄 아는 많은 지식인이 있듯이, 피카소의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는 혁명적인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림의 내용이나 해석 역시 쉽지 않다.

입체 냉각 방식과 입체파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고가의 전자 제품인 벽걸이형 에어컨과 비싼 전기료를 부담할 수 있는 특정 계층을 겨냥한 이 광고는 부와 교양이 일치한다는 등식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그림이라고 생각했는지 업체는 ‘그림 같은 에어컨’이라고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놓았다. 그것도 모자란다는 듯이 또 ‘입체 바람이 벽에 걸린다’는 설명까지 달았다.

한 호텔의 광고는 특정 계층을 겨냥한 광고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이 광고에 나오는 이미지는 1804년 12월2일 어느 추운 겨울날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장면이다. 이 그림은 네오클래시시즘, 즉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프랑스의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대형 역사화로 세계 미술사에서 역사화의 가장 탁월한 모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한 호텔이 나폴레옹의 대관식 장면을 기록한 그림을 광고에 활용했다. 대관식이 실제로 거행된 장소가 호텔이 아니라 성당이었다는 사실은 광고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네오클래시시즘, 자크 루이 다비드, 사진을 대신한 사료로서의 그림의 의미 등은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것이다. 호텔 광고는 오직 웅장함과 품격을 강조하기 위해 이 그림을 미학과 역사의 문맥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잘라내 썼다.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로 그림을 자주 못 본 이들은 호텔 내부를 원화에 붙여 합성한 광고를 원그림에 묘사된 성당 내부로 착각할 정도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관식 장면을 이용한 호텔 광고는 자본주의 사회의 왕족인 부자들을 겨냥한 광고가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사례들은 명작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거나 약간 변형한 정도의 광고들이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미술과 광고를 한결 유연하게 접목한 광고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한 벤처 기업의 이미지 광고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이용하고 있다.

이른바 멀티비전이라는 이름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이미 일상 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지만 과연 그것이 백남준이라는 거인의 기이한 퍼포먼스가 없었다면, 그리고 외국에서 먼저 그를 대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한국에서도 먹혔을까. 텔레비전을 마치 궤짝처럼 쌓아올린 이 광고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연상하지 않으면 큰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이다.

한 프랑스 주간지에 등장한 두 광고는 사진 작가이기도 한 만 레이의 그림과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을 활용하고 있다. 루즈를 지우는 세정액을 광고하는 첫 번째 광고는 누가 봐도 만 레이의 그림을 이용했다는 것이 쉽게 드러난다. 두 번째 광고는 발 냄새를 없애는 약품 광고다.

광고의 숨은 논리를 찾아서

이 두 광고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파편화된 인간의 욕망을 신체의 부분 이미지를 통해 묘사한 두 원작을 이용했다. 하지만 원작의 의미와 광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광고는 단지 상품의 용도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만 차용했을 뿐이다. 미술 작품을 이용한 프랑스 광고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 광고는 대부분 비너스, 만종, 모나리자 같은 ‘낡은’ 그림들을 이용하는 한국의 광고와는 달리, 많은 경우 초현실주의 이후의 컨템퍼러리 작품들을 이용하고 있다. 이는 현대 서구사회의 미의식과 감각이 인상주의 운동이 일어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현대 예술에 의해 격심한 변혁을 겪었음을 일러준다.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인 광고는 이러한 변화를 반증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광고는 마음놓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또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이미지들이다. 단순 소비자로 전락한 현대인의 불안은 양가성(兩價性)을 띤 광고 앞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이 갈등이나 불안을 우리는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광고 이미지들은 혼란이나 불안의 얼굴이 아니라 언제나 아름답고 다정한 모습을 한 채 소리 없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없이 부드러운 광고 이미지들은 특정 계층을 겨냥하거나 혹은 구매력과 인간을 동일시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논리를 가장 공개적으로 찬양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부의 논리를 마음놓고 비판할 수 없는 것은 광고 이미지들이 자유주의라는 미덕을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기회 균등과 경쟁의 원리를 근간으로 한다. 이는 개인주의의 미덕에 대한 전체적인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광고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해, 그리고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미래와 존재는 소유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소유는 타인의 부러움을 촉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래서 광고는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현대인의 이미지인 것이다.

이를 위해 광고는 유명한 회화와 조각 등에서 이미지들을 차용해 온다. 약간의 변형을 거친 것이든 아니면 완전한 패러디이든, 고전 명작을 이용하는 광고의 목적은 단순히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의미 있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숨은 논리들이다.

우선 예술 작품을 이용했을 경우 이런 광고는 이용된 작품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이 요구는 예술에 문외한인 많은 이들을 광고 타깃에서 제외함으로써 암묵적으로 계층을 나눈다. 하지만 요구되는 지식이란 심오한 것이 아니라 극히 피상적인 것일 뿐이다. 서구의 계몽주의도, 나폴레옹도 알 필요가 없다. 어디서 한번쯤 들어본 이름이면 충분한 것이다. 이는 문화와 구매력을 동일시하려는 의도로 풀이될 수 있는 현상인데 그 밑에는 예술에 대한 피상적인 관념, 즉 가장 지독한 형태의 모욕이 깔려 있다.

최근 4~5년 한국 인쇄 매체에 등장한 광고들을 순수예술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동일한 시각예술에 속하면서도 광고는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간주된 적이 거의 없다. 이는 이미지의 위력을 과소 평가한 까닭이며 읽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로 접어든 새로운 문화 양식을 폄하한 결과일 것이다. 본격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할 시점이다.



신동아 200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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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진 <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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