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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의 작가’ 서효원

깊은 절망, 뜨거운 소망이 낳은 자아 부활의 武曲

‘불꽃의 작가’ 서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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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의 작가’ 서효원

‘대설’ ‘실명마제’ ‘자객 무’ ‘실명대협’ 등 서효원의 주요 작품들.

그러나 두 번째 추락은 그에게 기억을 되찾아준다. 기억을 떠올리고 본래의 자신을 되찾은 주인공 앞에서 이제까지 은폐되어 있던 일들이 그 진상을 드러낸다. 대자객교주는 예전의 무림삼기 중 한 사람인 귀수옹이었다. 귀수옹은 자기 사문(師門)의 한을 풀기 위해 준비해온 것들을 배반한 제자 부궁석에게 모두 빼앗기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대자객교라는 청부살인 조직을 만든 것이다. 부궁석은 귀수옹에게서 빼앗은 것들을 기반으로 월영지존이 되어 무림을 일통(一統)하고 나아가서는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한 음모를 추진해왔다. 그 과정에서 주천업이 기억을 잃고 이혈릉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혈릉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모든 진상이 드러난 이제 남은 것은 이혈릉과 부궁석의 대결인 바, 이 대결에서 승리한 이혈릉이 기쁨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허망함을 느끼는 데서 이 작품은 종결된다.

‘대자객교’의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인공이 기억을 상실한 상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기억을 상실했다는 것은 본래의 자아를, 혹은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기억을 상실한 상태의 주인공은 거짓 자아이며 거짓 정체성일 따름이다.

이 구도는 서효원의 무협소설에 널리 나타난다. 가령 ‘대자객교’보다 앞서 나온 ‘대설(大雪)’의 주인공 백무엽도 자객인데 역시 기억상실의 상태로 등장하며, ‘대자객교’ 뒤에 나온 ‘자객 무(霧)’의 주인공 검류향은 기억상실은 아니지만 자신의 신분도 모르는 채 어려서부터 폐쇄된 감옥에서 성장해 자객이 된다. ‘실명대협(失名大俠)’의 능설비도 갓난아이 때 납치되어 마도(魔道)의 차세대 전사(戰士)로 훈련받으며 성장한다. 기억상실이나 갓난아이 때의 납치나 본래의 자아 내지 신분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주인공들의 거짓 자아, 거짓 정체성은 일차적으로 부정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자객이거나 마도 인물인 것이다.

업둥이 모티프와 실명(失名) 모티프



그에 반해 그들의 본래의 자아와 신분은 한결같이 고귀하다. 이혈릉은 황태자이고, 백무엽은 마도의 소종사(少宗師·마도 인물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고귀한 신분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이며, 검류향은 황제의 쌍둥이 동생이고, 능설비의 어머니는 황제의 사촌동생이다. 이렇게 보면 서효원의 무협소설은 자아를 상실한 인물이 자아를 회복하는 이야기이며 핵심적 모티프는 업둥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를 크게 업둥이형과 사생아형의 둘로 나눌 때 전자는 오이디푸스 이전의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며 부모 양쪽을 모두 부정하는 낭만주의 소설이고, 후자는 오이디푸스의 투쟁과 현실을 수락하며 아버지를 부정하고 어머니를 인정하여 아버지와 맞서 싸우는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주장한 마르트 로베르를 참조할 수 있겠다. 그런데 서효원의 업둥이는 콤플렉스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나타나는 업둥이다. 서효원의 주인공들은 모두 본래의 자아나 신분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좀더 생각할 것은 회복된 자아나 신분이 상실 이전의 자아, 신분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에는 커다란 변화가 수반되는데, 그 변화의 내용을 일종의 성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상실의 상태에서 겪는 고통과 그 고통의 극복 과정을 거친 자아가 본래의 자아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같지만 다르다’는 이 점을 중시하고 보면 그 변화는 자아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점이 가장 잘 나타난 인물은 백무엽이다. 백무엽은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자 더 이상 마도의 소종사가 아니라 천하제일협(天下第一俠)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대자객교’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실명(失名)’이라는 모티프도 서효원 무협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모티프는 주인공이 자신의 자아와 신분을 모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억상실 모티프와 다르지만, 잃어버린 자신의 것을 되찾는 이야기를 낳는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같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신의 신분을 은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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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 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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