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눈뜨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말랑말랑 곶감. 이 곶감을 두고 여행을 떠난다는 건 고통에 가깝다.
여행하다가 이 곶감이 생각나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없다면 ‘참을 수 없는 병’이 된다. 곶감으로 생기는 병은 곶감 이외에 약이 없으리라. 곶감 스무 개를 챙겨 넣었다. 이 정도면 그런 대로 견딜 만하겠지.
그런데 아이들에게 떠밀리듯 여행가는 게 조금 억울했다. 여행 가기 전날 저녁.
“얘들아, 엄마 아빠 여행 가는 데 뭐 없어?”
“뭘 해드릴까요?”
“음, 보통 자녀들은 부모가 여행을 간다면 용돈을 주지 않니?”
큰아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제 방에 다녀오더니,
“가는 길에 두 분이서 ‘다정하게’ 차나 한잔 하세요”
세어보니 2만원이다. 작은아이도 1만원을 보탠다. 이렇게 해서 여행 준비가 끝났다.
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무주 산골에서 진도 바닷가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국도로 한 시간 달리다가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몇 해를 호남 땅에 살면서 호남고속도로를 처음 타본다. 다시 국도로 빠졌다가 서해안고속도로로 옮겨 탔다. 이 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다. 여기가 정말 우리나라인가 싶다. 그래도 휴게소만 보이면 들렀다. 목적지에 몇 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이웃이 ‘되는 대로 편하게 오라’ 했으니까. 차에서 내려 몸도 풀고 간단히 쇼핑도 했다.
해가 질 무렵, 바다가 보이는 이웃집에 도착했다. 우리를 맞아준 것은 사람보다 바람이 먼저였다.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집안으로 마구 밀어넣는다.
오랜만에 이웃과 회포를 풀었다. 마당에 숯불을 지펴놓고 굴을 구웠다.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바람이 문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낯설지만 고단해서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바람이 육지에서 바다로 분다. 오줌을 누려고 서니 바람이 한사코 바다로 나를 밀어낸다. 바닷가에 살려면 바람과 친해져야겠구나.
아침에 이웃이 진도 어디어디를 가보라 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오늘 하루 특별한 계획이 없다. 그냥 형편대로 쉬면서 일도 하고 주위도 둘러보고 바다에도 나아가 보고.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고 싶다고 말했다.
아침을 먹고 아내와 뒷산을 올랐다. 겨울산은 우리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다. 바람을 막아주고, 몸을 따뜻이 해줄 땔감이 있는 곳이며, 세상을 드넓게 볼 수 있는 눈을 준다. 낯선 바닷가로 곧장 가기보다는 높은 곳에서 바다를 살피고 싶다. 산을 오르는데 처음 보는 열매가 많다. 빨간 청미래 열매도 우리 지역보다 굵고 빛깔이 곱다. 하나 둘 섬이 신천지처럼 보이고, 해안가에는 무슨 양식장인지 부표가 논두렁처럼 가지런히 뻗어 있다.
내려오는 길에 여기저기 썩어가는 나무가 보인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 땔감거리로 안성맞춤이다. 어깨에 메고 내려오니 뭔가 일을 한 것 같다. 내 일상의 한 부분이 여기에도 있다.
물때에 맞추어 우르르 바닷가로 갔다. 온갖 생명이 바위틈에 붙어 있다. 이웃에게 하나 둘 배운다. 고둥을 이곳에서는 ‘고동’이라 했다. 진도에 왔으니 이곳 말을 써야지. 고둥보다 고동이 더 살갑다. 톳도 자란다. 바위에 붙은 굴이 가장 끌린다. 조새(굴 따는 도구)로 껍데기를 벌리고 그 자리에서 굴을 먹어본다. 바닷물로 간이 되어 날로 먹기가 좋다. 한번은 조새로 껍데기를 까고는 바위에 엎드려 입맞춤하듯 먹어보았다. 바다를 먹는 듯 또 다른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