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몰락으로 어머니가 일수 돈을 쓰신 것 같아요. 일수 돈 알아요? 목돈을 빌리고 매일매일 이자를 붙여서 갚아 나가는 거지요. 요즘에도 장사하는 사람들은 매일 현금이 생기니까 그걸 쓰기도 하지만, 그땐 가정집에서 그런 돈을 빌려 쓰곤 했지요. 일수 돈을 받으러 오는 일수쟁이에게 시달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떠올라요. 어머닌 마치 죄인처럼 그 일수쟁이 할아버지가 오기만 하면 고개를 숙이면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어떤 장면은 흑백사진처럼 남아 있고, 어떤 장면은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선생을 행복하게 한 눈사람은 사진으로 남아 있고, 어머니의 고단함은 동영상으로 남아 아직도 선생의 가슴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다.
혹시나 이 ‘작가 열전’을 계속 읽은 독자는 이미 다음 문장을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부연하면 내가 만난 작가나 예술가들은 모두 결핍의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 고통은 마치 놀이터의 시소처럼 작가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 그 작가가 성장해서 몸무게가 늘고, 명예나 부가 축적되어도 그 고통과 결핍은 같은 무게로 늘어난다. 그래서 그 시소가 움직이는 것이다. 정호승 선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 또한 청소년기를 지독한 가난 속에서 보낸 것 같다. 그것은 이렇게 문득 찾아온 것일까. 선생에게는 어린 시절에 갑자기 당한 폭력의 기억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인 걸로 기억합니다. 어떤 집 대문 앞을 지나는데 어른이 나오더니 갑자기 내 멱살을 잡고 ‘너 돌 던졌지’ 하면서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선 마구 패는 거야. 아마도 어떤 애들이 그 집에 돌을 던지면서 몇 번을 지나간 모양인데 내가 공교롭게 그 앞을 지나가다 봉변을 당한 거지요. 아픈 거도 아픈 거지만, 심한 모멸감과 억울한 생각에 눈물이 났지요. 그때 일이 잊히지 않아요.”
단란한 가정에서 유년을 보낸 선생에게 찾아온 가난은 어느 날, 대문 앞을 지나다 끌려가 마구 폭행을 당한 것처럼 선생의 삶을 ‘패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찾아온 집안의 가난은 이후 전개되는 선생의 일상, 즉 경건하고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직장인의 미덕을 갖추게 한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이유로 가족이나 주위 사람에게 신세를 지면서 사는 시대는 천상병 선생 이후로는 그만 해야 된다는 생각이에요.”
까까머리에 전해진 따스한 손길
마침 선생과 만난 장소가 인사동이었다. 보리수라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다음에 술자리를 옮기듯이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천상병 선생의 부인이 운영하는 찻집 ‘귀천’이었다. 천생 소년 같은 천상병 선생의 생전 모습을 보면서, 시인이기 때문에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한 친구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호승 선생의 시는 별을 보고 쓴 시들이다. 즉 주경야독, 낮에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시는 별빛을 보고 썼다. 그래서인지 선생의 시는 늘 밝게 빛난다. 그리고 그 별들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빛나고 있다.
먼 하늘의 별빛을 노래하기에 그의 낮은 너무나 뜨거웠다. 그래서 그는 태양 아래서 본 사람들의 모습을 그 별빛으로 끌어당겨 원고지에 적어놓았던 것이다. 한 사람을 보기 위해 하나의 별을 탄생시키는 시의 밤은 미루어 짐작만 해도 눈물이 난다. 고생해본 놈이 고생한 사람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법이다.
문학에 눈을 뜬 계기는 아버지였다. 대구 계성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민중서관 판 ‘한국문학전집’을 집안에 들여놓았고, 그 덕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소년의 눈에 새로운 세상으로 보였다. 겨울방학 내내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었는데, 어머니가 짜준 털옷 팔꿈치가 해져 ‘빵꾸’가 날 지경이 되도록 읽었다고 한다. 한겨울 이불을 쓰고 어두운 불빛 아래 엎드려 읽는 자세는 시력을 나쁘게 했고, 이후로 안경을 써야 했다. 그때 박계주의 ‘순애보’ 같은 작품을 흥미롭게 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