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대표적 에로영화인 ‘나인 하프 위크’는 위험과 일탈에 중독된 사랑을 그렸다.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주식 중개인 존과 만나게 된다. 나빠지고 싶었던 여자 엘리자베스는 나쁜 세계로 성큼성큼 안내하는 존에게 빠져든다.
둘은 마치 모험을 하듯 서로의 육체에 빠져들어 관능의 한계를 넘어선다. 무료하던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안전한 일탈을 감행한다. 하지만 무릇 일탈이란 사랑으로 인해 가능한 외계일 뿐 사랑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일탈과 모험이 짜릿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때 사랑이란 단어는 무색해진다.
섹스와 일탈만으로 충만한 9주 반
존의 제안은 대부분 위험하지만 매력적이다. 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는 일상은 없고 일탈만 있는 존으로부터 달아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결코 그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남자는 위험과 일탈에 중독되어 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그’와 일탈하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그저 어떤 여자와 ‘일탈’을 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마침내 여자는 남자의 제안을 거부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나누는 사랑의 기간이 9주 반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개념으로 바꾼다면 두 달 남짓, 정서상 백일 무렵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법하다. 9주 반이라는 시간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지탱 가능하다.
그는 나에게 완전한 타자이므로 9주 반 동안 그는 매일 새로운 상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9주 반 동안의 시간은 섹스와 욕망, 일탈과 충동만으로도 충만할 수 있다. 하지만 10주쯤이면, 그러니까 호기심이 관계로 바뀔 즈음이면 일탈은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엘리자베스는 군중 속에 섞여 사라진다. 그리고 존은 계단에 걸터앉아 그녀가 50을 세기 전에 되돌아올 것이라며 읊조린다. 그것은 독백이라기보다는 간절한 바람이며 주문에 가깝다. 어떤 점에서, 옷장 속에 똑같은 옷만 수십 벌 걸어놓고 있는 존은 모험과 일탈을 사랑의 동의어로 착각하는 현대인과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섹스를 사랑으로, 일탈을 일상으로 바꾸기를 두려워하는 어린애에 불과할 수도 있다. 호기심이 관심으로 바뀌는 시간, 그는 9주 반을 견디지 못한다. 9주 반, 몸에 대한 호기심으로 버틸 수 있는 관계의 유효기간이다.
▼ 결국 몸은 마음이기에 ‘피아노’
제인 캠피온 감독의 작품 ‘피아노’는 사랑에 빠진 여성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드라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말이다. 베인스(하비 키이틀)와 섹스를 하고 난 후 집에 돌아 온 에이다(홀리 헌터)는 침대 위에 누워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다. 왼쪽으로 누웠다, 돌아누웠다, 고개를 들거나 내리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그녀의 행동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가 거울을 통해 보는 자신은 누구의 시선일까? 그 시선이 바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것, 그 눈빛이다. 그러니까 에이다는 사랑하는 남자, 베인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쳤을지 상상한 셈이다.
‘피아노’는 여성에게 다가가는 두 가지 대조적인 접근법을 보여준다. 그 중 하나는 남편, 스튜어트(샘 닐)의 방법이다. 스튜어트는 남편이라는 이유로 자기 마음대로 그녀를 움직이려 한다.
물론 억압적인 방식으로 그녀에게 횡포를 부린다거나 가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그저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예 언어나 내면, 욕망 따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않는다. 너무도 당연히, 그는 에이다에게 피아노가 어떤 의미인지, 그녀가 꿈꾸는 삶이 무엇인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아니, 관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