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서긴 했지만 그는 매일 통증이 심한 다리를 주무르며 잠자리와 먹을거리에 대해 불평하고 신의 존재를 의심하며 언제라도 포기하고 돌아갈 생각만 하는 심드렁한 순례자였다. 하지만 긴 순례길은 그를 서서히 바꿔놓는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나의 호흡, 나의 발걸음, 바람, 새의 노랫소리, 물결치는 옥수수밭,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신선한 기분. 나는 조용히 걸어간다. 걷는 동안 내가 내 발로 길을 밟는 건지, 길이 내 발을 밟는 건지? 길 위에 죽어 있는 고양이와 같은 추함이나 눈 덮인 산봉우리의 아름다움도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아무런 강요가 없는 상태는 순수, 신선의 경지다. 기쁨을 주지 않지만, 고통 또한 주지 않는다.… 내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아도 나는 항상 거기에 존재한다. 길 위에서 나는 항상 한 가지와 맞닥뜨린다. 그건 바로 ‘나’다.”
나를 비우면 신이 그 곳을 채운다
야고보의 길은 순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주고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든다. 그러다 어느 날 그들은 길 위에서 신을 만난다.
“어느 때부터인가 누구나 길에서 울기 시작합니다. 길이 사람을 그 어느 때에 이르게 하죠. 그러면 그냥 거기 서서 울부짖게 돼요.”
네덜란드에서 온 라리사가 이런 말을 했을 때 그는 유치한 소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스페인인 아스토리가 포도밭 한가운데 서서 마른 하늘에 벼락 치듯 그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 표현할 수도 없다. 지쳐서? 기뻐서?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서? 포도밭에서 운다고?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날 그는 일기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나는 신을 만났다!’
길을 걷다가 아무런 생각이 없어지는 상태, 즉 완전하고 담담한 공허는 진공의 상태다. 신은 그 진공을 채운다. 하페는 계속 적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비웠다고 느끼는 사람은 인생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다.”
야고보의 길이 하페에게 안겨준 선물은 신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였던 적이 없다. 어느 순간 대화가 눈물겹도록 그리워진다. 진정한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순례자의 길에서 만난 동지들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재산이 된다. 늘 명철한 분석가인 리버풀 출신의 앤이 그렇고, 뉴질랜드 출신의 지혜로운 쉴라, 암스테르담에서 온 요세는 마지막까지 동행을 한다. 그중에는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신이 길 위에서 그런 이들과 만나게 하신 이유가 있었다. 그들을 통해 가슴속에 쌓아둔 분노를 발견하고,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확인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물론 이 모든 축복은 용감하게 길을 나서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다. 자신을 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이가 편안한 집과 빠른 자동차를 놓고 두 발로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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