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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일기

황혼일기

3/11
×월 ×일 영정사진

모친상 당한 친구 상가를 들렀다가 나오면서 문득 어머니 영정을 준비해둬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연세가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떨지 모르고, 그건 당연히 장남인 내가 할 일 가운데 하나니까 말이다.

지금 얼굴은 너무 노안(老顔)이라 좀 그렇고, 그렇다고 너무 젊었을 때 사진을 쓰기도 뭣해, 칠순 때 가족들과 찍은 사진 가운데서 어머니 얼굴만을 떠내, 확대해서 뽑는 게 좋겠다고 결정을 한다.

“이왕 사진관에 갈 거, 그만 이녁 거도 이번에 하나 만들어놓지.”

같이 사진을 뒤적거리며 이것저것 들춰보던 아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넌지시 던진 말이다.



“이 사람이 이게 무슨 소리여.”

내 입에서 나온 소리다. 듣기에 따라 얼른 가도록 부추기는 소리로 들려서다.

“무슨 소리는? 왜 내가 안 할 말을 했수. 남의 일도 아이구마, 그러네.”

아내가 정색을 했다. 나만 농으로 들었지 아내는 진지하게 마음 두어 한 이야기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친구들과 같이 나눈 이야기가 생각난다. 친구 가운데는 영정을 마련해놓았다는 이가 더러 있다. 묘터를 준비해놓았다는 친구도 있고, 상석(床石)까지 해둔 이도 있는 모양이다.

“반월당 지하철 휴게실에 한번 가보라구. 비싸지도 않더구만. 젊은 친구들이 즉석에서 그려주는데, 아르바이트 한다면서 만원만 달래. 바쁘면 사진을 줘도 되구. 인화지로 뽑아낸 사진보다는 훨씬 오래 간다는구마.”

당시는 건성으로 듣고 말았는데 갑자기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앨범을 꺼내 여기저기 들춰본다. 그런데 웬 사진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내 사진으로 가득한 앨범만 6권이다. 그래도 사진이 남아 비닐봉투 속에 든 게 여러 묶음이다. 언젠가는 한번 정리를 해야지 하면서도 못하고 그냥 둔 것들이다. 아내 사진첩은 따로 두 권이 있는데도 그렇다.

그동안 살아오며 치른 각종 행사에다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많이는 못 다녔지만 서너 번 다녀온 해외여행을 하면서 찍은 것들이다.

“사진 이거 다 우짤라카요?”

“우짜긴. 그건 모슨 소린데?”

“죽을 때 가지고 갈 순 없잖소. 그렇다고 애들한테 보관하라칼 수도 없는 거고. 저거들 필요한 거 한두 장만 가지고 있으믄 그만일 건데.”

“….”

“찍을 때 그때가 좋았제. 이자 다 끝난 기라. 둬봐야 우리 죽고나믄 애들한텐 모두 짐 덩어리라 카이.”

“그만 시끄럽다. 오늘 낼 죽을 거도 아닌데 무슨 말을 그래 하노.”

아닌 게 아니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두 짐 덩어리다. 하나같이 찍을 때는 나중에 사진밖에 남는 게 뭐가 있느냐 해서 부지런히, 남보다 한 장이라도 더 갖겠다고 수선을 피우며 찍었는데, 종착역이 눈앞인 지금 보니 괜한 짓을 한 것 같은 기분도 설핏 든다.

‘인생은 一代, 사진은 萬代.’ 한 앨범 표지에 박힌 글귀다.

사람이 잘나서 역사책 모퉁이에 한 줄이라도 오를 수 있는 위치라면 모르거니와, 우리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생의 마감과 함께 사진도 같이 없어지는 게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자식은 또 그렇다 치더라도 30~40년 뒤 얼굴도 모르는 손부(孫婦)가 그 사진을 보고 뭐 그리 대단하게 여길 것인가. 결국은 쓰레기로 돌아다니다가 사라질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구 모르겠다, 어머니가 든 사진 한 장만 빼놓고 나머지는 처음 있던 그대로 뭉뚱그려 책장에 넣어둔다. 나중에, 그 나중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때 시간 봐서 정리하기로 하고 미뤄버린다.

그러다가, 어영부영하다가 그 정리를 결국은 내가 못하고 마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당선소감

황혼일기
李應洙

●1942년 경북 성주 출생

●KT (대구)홍보팀장 역임

●매일신문, 조선일보 등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저서: 문화비평집 ‘꼴깝’ ‘영부인은 직위가 아닙니다’ 논픽션 ‘아파트경비원’ 등

이제는 다 지난 일들이어서 별 의미가 없지만, 한때 나는 신문 ‘인사동정’란 같은 데에 사람이 나오면, 먼저 그 사람의 나이와 내 나이를 비교해보고, 내 처지랑 이런저런 비교를 해보면서 꿈을 저울질하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상대방 나이 묻는 걸 결례로 알고 있다. 연예계 사람들한테는 금기사항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다. 나이가 그만큼 거추장스럽고 힘겨운 짐덩이가 된 것 같아 안쓰럽다.

어느 틈에, 나 또한 어릴 때 할머니들이 읊조리던, 내방가사에서 따온 듯한 ‘늙어 대접받는 건 호박뿐’이란 말이 실감나는 내리막 계절에 서 있게 되었다.

지난해 연말 나는 변산반도 한 자락의 민박집에서 보냈는데, 해넘이를 보러 온 사람들이 뜻밖으로 많음을 보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괜히 흐뭇해진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남아 나를 들뜨게 만든다.

“일출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일몰도 참 아름답구먼. 저기, 타는 노을을 한번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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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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