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위에
철쭉꽃보다 아름답게 핀 웃음.
허허허 흘러내리는 그 웃음소리
등짐으로 가득 지고 내려와서
오려내고 다듬어
그대와 함께 살 집 하나 지으면
그 속에서 한 천년은 행복하리.
(중략)
저 벼랑 위에
철쭉꽃 붉은 빛보다
더 곱게 피어 있으니
혹 수로부인이 지나면
포동한 가슴 꼭 품어가고 싶으리.
- 문효치 시 ‘서산마애삼존불의 웃음’
‘치맛자락을 들추는’ 첫 행과 ‘포동한 가슴’의 마지막 행에서는 시가 의도하는바 에로틱한 분위기가 그대로 노정되는데 이는 웃음 웃는 불상의 건강성과 활달성을 높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된다. 그 웃음이 얼마나 어여쁘고 넉넉하다고 봤으면 그 웃음으로 지은 집에서 사노라면 천년이 행복하겠다고 했을까. 신라 최고의 절색인데다 ‘끼’마저 넘치는 수로부인을 이곳 서산까지 모셔 오는 시인의 솜씨도 날렵하다. 오만 가지 신물(神物)까지 여인네의 미모와 끼에 혹해 납치 소동도 마다하지 않는 통에 평생이 고단했을 강릉태수 순정공(純貞公)이야 절색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업보를 그렇게 갚음하면 되지만, 이윽고는 그 아내가 포동한 가슴의 부처님을 보곤 한눈에 반해 제 손으로 껴안고 떨어질 줄 모른다면 한숨밖에 더 날 게 없을 듯싶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와 문화재전문위원 신영훈 선생은 각기 이 마애불의 발견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를 재미나게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유 교수의 책에는 이 마애불이 1959년 4월 홍사준(당시 부여박물관장) 선생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고 돼 있는데 신영훈 선생의 수기에는 본인과 함께 홍사준, 황수영(당시 동국대 교수) 등 세 사람이 찾아낸 것으로 적혀 있다.
유 교수의 글에 의하면, 보원사 터를 조사하러 왔던 홍사준 선생이 인바위 아래 골짜기에서 만난 한 노인에게 근처에 탑이나 불상 같은 걸 본 적 없느냐고 물었다. 노인의 대꾸.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계시는데유. 양옆에 본마누라하고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을 볼따구에 찌르면서로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겄지 하고 약 올리니까 본마누라 화가 나서리 장돌을 쥐고 쥐어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가운데의 본존 여래불이 양옆으로 반가보살과 봉주보살의 협시(夾侍)를 받는 모습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해학적이고 통렬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싶다. 최초 발견자가 누구냐 하는 점은 차라리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발견이라고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알고 있던 것을 학계가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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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불의 조성 연대에 대해서 학자들은 대략 6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에 한강유역을 내주고 웅진으로 밀려났던 백제는 무령왕 때에야 비로소 다시 태안반도에 수군기지를 구축하고 대륙으로 통하는 바닷길을 열 수 있었다. 당시 태안반도에서 웅진이나 사비로 가려면 지금의 서산과 예산을 거치는 길이 지름길이었으며 서산마애불이 있는 지점은 바로 그 옛길의 입구가 되었다. 대륙교통로의 안전과 융성을 비는 목적으로 이러한 마애불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용현계곡을 좀 더 올라가면 발굴 작업이 끝난 신원사터를 만날 수 있으며 찻길은 이후 작은 마을에서 끝난다. 신원사터에서 곧장 산으로 오르면 가야산의 한 봉우리인 일락산까지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다. 산이 높이 않은데다 둘레길 모양으로 잘 정비돼 있기 때문이다. 천년 고찰 개심사(開心寺)가 바로 이 산 너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