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 이대엽에게는 넘어야 할 큰 산들이 있었다. 액션 영화에서는 장동휘와 박노식이었고, 멜로 영화로 가면 신성일을 비롯해 너무 많았다. 이대엽과 같은 시기에 데뷔한 남궁원은 훤칠한 키에 선 굵은 미남형 얼굴로 일찍부터 주연급 배우로 성장하고 있었다. ‘빨간 마후라’에서 남궁원은 최무룡과 대결하는 주연이었지만, 이대엽은 그들을 보조하는 조연이었다.
박노식과 이순재 사이
배우는 얼굴이 중요하다. 이대엽의 얼굴은 잘생긴 편은 아니지만,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와 비슷하게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개성을 지닌 선배들이 있다. 장동휘와 박노식은 항상 김진규, 신영균, 신성일 같은 미남배우를 괴롭히는 조연으로 영화에 출연했지만, 연기에 대한 남다른 욕심과 열정이 만들어낸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들은 미남 배우를 압도하는 악의와 광기를 발산해 영화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살린다. 특히 박노식의 경우, 자신에게 온 영화가 일생에 다시는 못 잡을 좋은 영화라는 판단이 서면 선후배 간에 싸움을 벌여 술병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까지 광기를 만들어내 영화에서 뭔가를 해내고야 만다. 그래서 그들이 스타이고 최고의 배우인 것이다.
이대엽에게도 박노식, 장동휘 같은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요구되는 시기가 왔다. 이대엽이 비슷한 반공 전쟁 영화의 비슷한 캐릭터 단골 조연으로 굳어질 무렵인 1960년대 후반.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배우와 감독이 속속 등장한다. 그의 선배 세대인 장동휘, 박노식이 조연급 성격배우에서 주연급 연기파 배우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을 때, 이대엽도 연기력 있는 성격배우를 목표로 틈을 노린다. 당시 최고의 감독 김수용과의 만남이다. ‘까치소리’(1967) ‘순애보’(1968)에서 이대엽은 악역으로 출연해 주연급 배우들을 압도하는 성격 배우로 자신의 연기 영역을 넓히려 한다. 1960년대 초 이만희 감독과 작업하며 경상도 사나이의 투박한 매력을 연기했다면, 이제는 김수용 감독과 만나 자신의 연기 영역을 넓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연기에 주목하지 않았다. 연기가 나쁜 것도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해 만들어진 ‘카인의 후예’(유현목 감독)에서 압도적인 악역을 해낸 박노식에게 시선이 모였다. 박노식은 40대 연기자만이 할 수 있는 원숙한 연기에 광기 어린 카리스마까지 더해진 명연을 펼쳤고, 장동휘는 이만희 감독의 ‘암살자’(1969)에서 매력적인 니힐리스트 킬러를 연기했다.
이대엽에게 박노식과 장동휘는 너무 큰 산이었다. 그들이 30대에 맡았던 역이 자신에게로 와야 하는데 아직 이대엽에게는 그런 카리스마가 없었다. 갈 길이 멀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성격 배우들도 만만치 않았다. 이순재, 오지명, 최불암 등. 탤런트란 이름의 배우들이 영화계로 치고 들어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위로는 장동휘와 박노식이, 아래에서는 이순재, 오지명, 최불암, 문오장, 김성옥이 치고 올라왔다. 새로운 감독도 등장했다. 미스터리 액션 영화를 장기로 삼겠다는 장일호, 전쟁 영화의 고영남, 검객 영화의 최인현, 협객 영화의 김효천 등. 뭔가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갈림길이었다.
이대엽에게도 기회는 온다. 홍콩 무협 영화 바람이 이 땅에 불어온 것이다. 40대 장동휘 박노식보다는 30대 이대엽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무협 영화에서는 액션 영화보다 난도 높은 액션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1968년 이대엽은 검객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된다. 이대엽의 얼굴에는 홍콩 무협영화 배우인 왕우에 뒤지지 않는 남성적인 매력이 있었다. 홍콩 영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의 표절작인 ‘대검객’(강범구 감독, 1968)에서 이대엽은 남궁원과 함께 주연을 맡는다. 같은 해 박노식과 함께 정창화 감독의 ‘나그네 검객 108관’에도 출연한다. 그리고 다음 해, 마침내 단독으로 검객 영화 주연을 맡는다. 최인현 감독의 ‘3인의 여검객’, 임원식 감독의 ‘맹수’, 홍콩과 합작 영화 ‘용문의 여검’ 등이었다. 한홍 합작 영화 ‘용문의 여검’은 영화 프린트와 네거티브 필름 모두 남아 있지 않아 볼 수 없지만, 제목이 좀 그렇다. 여검이라니.
영화 ‘맹수’가 시작되면 매우 젊고 아름다운 여자 검객이 등장한다. 맹인 검객이다. 아름다운 맹인 여협을 연기하는 여인은 누구일까? 놀라지 마시라. 사미자다. 비슷한 시기 홍콩에서 개봉한 여배우 정패패 주연의 ‘방랑의 결투(원제 대취협)’(1966)와 ‘심야의 결투’(1968)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나라에도 여검객이 등장하는 영화가 나온 것이다. 맹인 검객 사미자는 일본의 맹인 검객 ‘자토이치’가 쓰는 칼과 비슷한 지팡이 속에 날카로운 검이 숨겨진 맹인용 지팡이를 무기로 사용한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칠고 야비한 남성들과 갈대밭을 누비며 결투를 벌인다. 그녀의 뛰어난 검술과 미모는 사내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고, 주막의 봉놋방 구석에 누워 자고 있는 사내의 귀에까지 전해진다. 사내들이 야비한 호기심으로 사미자의 인상착의를 이야기하자 벽을 향해 몸을 누이고 자는 것으로 여겨졌던 사내가 몸을 돌린다. 이대엽이다. 그가 바로 맹인 여협 사미자에게 검술을 가르친 사부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사미자가 나와 자신의 원수인 도금봉과 그녀의 일당을 찾아 헤맨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이대엽 주연 영화가 아니다. 물론 영화에서 주연자리가 뭐 그렇게 중요한가? 영화를 위해 좋은 연기를 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대엽은 이 영화에서 사미자의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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