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2일 한국해비타트 주최로 열린 박술녀 한복패션쇼에서 배우 박정수(왼쪽)와 산악인 엄홍길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 씨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 부인의 한복 맵시를 비교하는 여성지의 화보특집에 의상을 협찬한 적이 있다. 그 일로 한복 치수를 재려고 노무현 민주당 후보 부인 권양숙 여사,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부인 한인옥 여사를 만났다.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 부인 김영명 여사는 “그냥 집에 있는 한복을 입고 촬영하겠다”고 해서 만나지 못했다.
“권양숙 여사는 살림살이만큼이나 소박한 분이었어요. 가락지도 하나 없고 한복도 다 낡았더라고요. 두루마기도 하도 옛날 것이라 소매를 줄여드린 기억이 나요.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 건 그날 먹은 칼국수 맛이에요. 한복 치수를 재러 아침 일찍 그댁엘 갔는데 마침 자녀들에게 먹이려고 칼국수를 끓이고 계셨어요. 칼국수 냄새가 하도 구수해서 ‘맛있겠다’고 했더니 권 여사가 아드님에게 ‘넌 나가서 먹어라, 이건 박 선생 드리게’ 하셨어요. 참 인간적인 모습이었어요.”
▼ 한인옥 여사는 어땠습니까.
“대통령후보 부인이니 얼마나 바빴겠어요. 그런 와중에도 저희 숍을 방문해 한복 색상을 직접 고르셨어요. 아마 상아색이었을 거예요. 한복에 굉장한 관심과 애정이 있는 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가 지은 한복을 좋아하는 단골 고객 중에는 정·재계 인사도 많다. 제 발로 찾아온 이도 있지만 정부 행사나 패션쇼가 인연을 맺어준 이도 있다. 박 씨는 그 가운데 한복 사랑을 제대로 실천한 인사로 A 전 장관, B 전 국회의원, C 전 검찰총장을 꼽았다.
정치인의 두 얼굴
“A 전 장관이 장관 재임 중 국경일 행사 때 입을 한복을 다급하게 빌리러 왔어요. 대통령이 그날 한복을 입으니까 참석하는 사람도 한복을 입어야 한다면서. 제가 짜증을 팍 냈죠. ‘연예인은 배역 때문에 한복 입을 일이 많아서 빌려준다. 안 빌려주면 한복이 잊힐까봐 빌려주는 건데, 장관님께서 이러시면 어떡하느냐’고. 그랬더니 ‘박 선생, 나 무서운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말도 못 붙이는데 박 선생은 할 말 다 하네’ 그러시더라고요. 좀 심하게 군 게 미안해서 나중에 한복을 지어 보내드렸더니 봉투에 옷값을 넣어 보내왔어요. 깜짝 놀랐죠.
C 전 검찰총장은 한복을 정말 사랑하세요. 한복엔 두루마기를 꼭 챙겨 입어야 한다고 하시는 분이죠. 또 B 전 의원은 활동이 한창 왕성할 때 부인과 한복 입고 찍은 사진을 연하장에 붙여서 지인들에게 보내시더라고요.
그런가 하면 얼마 안 되는 한복 대여료나 세탁비를 요구한다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자기 정도의 지위와 명성을 가진 사람은 한복을 거저 입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고.”
▼ 그런 사람이 많나요.
“한복을 만날 거저 입고도 고마워하기는커녕 나중에 장관이 되니까 안면 몰수하는 사람도 봤거든요. 장관이 되기 전에는 우리 한복을 자주 입었어요. 절대 사가진 않고 빌려갔죠. 전화로 한복을 갖다달라면 직접 들고 가서 입혀주고 그랬어요. 패션쇼를 하면 우리 한복을 입고 축사를 해주기로 했는데, 행사를 이틀 앞두고 손바닥 뒤집듯이 약속을 깨더라고요. ‘그런 데서 축사할 상황이 아니다’라면서. 그러더니 장관이 되고 나서는 안면을 싹 바꿨어요. 언제 봤냐는 식으로. 권력을 쥐면 사람이 변한다는 걸 실감했죠. 근데 변해도 너무 변하더라고요. 축사는 결국 B 전 국회의원이 대신 해줬어요.”
그는 B 전 의원과 C 전 검찰총장을 “따뜻하고 의리 있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평가 기준을 묻자 그럴 만한 답이 돌아온다.
“C 검찰총장 부인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딸 한복은 우리 집에서 하고, 부부 한복은 다른 데서 하려 했더니 총장께서 이렇게 말했대요. ‘우리 집에 혼사 있는 것을 뻔히 아는데 당신이 다른 집 한복을 입으면 박 선생이 얼마나 서운하겠어. 우리가 앞으로 살면서 한복 입을 일이 몇 번이나 있다고!’ 그분들이 정말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에요. 협찬은 절대 안 받으시죠.”
▼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인은 누구인 것 같습니까.
“여성 중에는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이 한복 맵시가 좋아요. 얼마 전 잡지 화보를 찍을 때 검은 치마에 하얀 모시저고리를 입혔는데 참 예쁘더라고요. 남성 중에는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이 한복 입었을 때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추석이나 설을 쇠기에 앞서 한복을 손질하는 집이 많았다. 차례를 지낼 땐 한복을 입는 것이 관례였다. 여학교에서는 가정 시간에 한복 짓는 법과 동정 다는 법, 고름 매는 법을 가르쳤다. 지금은 보기 드문 풍경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복은 점점 입기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으로 우리 삶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박 씨의 우려처럼. 한복을 직접 짓진 못해도 멋스럽게 입는 법쯤은 배워두는 게 한복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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