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사장은 1990년대부터 중국으로 섬유공장이 이전하기 시작하면서 일감의 단가가 떨어졌다고 했다. 섬유산업은 점점 사양화했다. 당시 조승만 씨는 30대였다. 줄어드는 일감에 직장을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변변찮은 수입 탓에 고시원, 여인숙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양 사장은 조승만 씨가 결혼하지 못한 데는 불안정한 수입이 한몫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의지가 있었으면 결혼했을지도 모르지. 사실 우리도 일이 불안한 건 매한가지지만 다 결혼은 했거든. 아무래도 (가족에게) 버림받은 게 크지 않았나 싶어.”
양 사장은 조승만 씨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어려서 친부모에게 버림 받았다. 친누나가 있지만 외국으로 입양되면서 연락이 끊겼다. 다행히 조 씨도 입양되어 새 가족이 생겼다.
“강원도 인제인가 원통인가 아들 없는 집에 양자로 들어갔대…. 근데 그 집이 사업에 실패해서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결국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에서 나왔대.”
홀로 마시던 술
조승만 씨는 2, 3년 전부터 “나는 오래 안 산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 그가 술을 갑자기 많이 마시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젊을 때도 술을 마셨지만, 일 나가기 전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던 그였다.
술을 마시면서 그의 삶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밥 대신 술을 마시기 일쑤였고, 일이 있어도 공장에 나오지 않았다. 매일같이 동료들과 어울렸지만, 모두 가정으로 돌아가고 나면 혼자 또 술을 마셨다.
“죽기 전날 절 찾아왔거든요. 겨울이었는데. 저희 집 방이 두 개인데 방 하나가 비어 있었어요. 들어와 살라고 할 걸. 그 말을 못한 게 가장 후회가 돼요.”
십년지기 동료인 아저씨는 조승만 씨 앞으로 우편물이 날아올 때마다 후회된다며 눈물을 훔쳤다. 주위에선 그가 재기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 사장은 일을 안 나와도 월급을 챙겨줬고, 식당 주인은 ‘술은 못 줘도 밥은 언제든 공짜로 주겠다’며 밥을 차려줬다. 많은 배려에도 그는 끝내 자살을 택했다. 십년지기 동료 아저씨는 말했다.
“돈 모을 생각을 안 했어요. 삶에 의지가 없었죠. 가족이 없으니까 그랬겠죠.”
7장
버려진 남자, 최명식

“배다른 누나가 있을 거예요, 아마. 부모하고는 일찍 헤어진 것 같던데.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고시원 주인은 최명식 씨가 아내와 이혼했다고 말했다. 그 후 그는 고시원에 들어와 4년 동안 머물렀다. 주인은 그가 직장 동료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혼자 지냈다고 기억했다. 그 외 더 알고 있는 건 없었다.
최명식 씨의 마지막 일터인 ㅅ택시 회사에 찾아갔다. 고시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사무실 안. 직원들은 맹목적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고, 곳곳에는 사훈을 비롯해 기운을 돋우는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주차장 한 켠에는 같은 복장을 한 한 무리의 운전수들이 보였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최명식 씨와 가장 가깝게 지냈다는 지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혼, 그리고 아들의 외면
그는 최명식 씨의 초등학교 6년 후배로 둘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둘은 한동안 연락이 뜸했다가 ㅅ택시에서 재회했다. 최명식 씨는 이곳에 오기 전에 사업을 했고, 어느 기업 회장의 운전수로도 일했다.
“그 형이 원래는 참 성실했다고. 그런데 이혼하더니 갑자기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하더라고.”
후배는 최명식 씨가 사업 실패로 이혼했을 거라 짐작했다. 최 씨는 아내와 헤어진 후 술을 마셨지만 그렇다고 일을 빠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