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분단 상황에서도 진한 우정을 나누는 남북한 병사의 이야기를 다뤘다.
일각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가 군 의문사 중 하나인 김훈 중위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찬욱 감독이 부인한다. 굳이 거기서 가져왔다면 판문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살인사건일 수 있다는 것 등 정도라고 그는 말한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원래 박상연 작가의 소설 ‘DMZ’의 판권을 영화사 명필름이 사면서 영화화 한 것이다. 명필름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건축학 개론’ 등 수많은 영화를 제작하며 국내 최고의 제작사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박상연 작가 역시 이후 영화로는 ‘화려한 휴가’와 ‘고지전’, TV드라마로는 ‘뿌리 깊은 나무’ 등을 써 국내 최고 시나리오 및 드라마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원작의 사용 여부를 놓고 다소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건 순전히 박찬욱의 작가적 특질 때문인데, 과거 1940년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그랬듯, 그는 원작에서 단 한 가지 정도의 설정만을 가져올 뿐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뒤바꾸거나 아예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박찬욱은 히치콕의 영화 스타일을 선호하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히치콕 적자(嫡子) 감독으로 손꼽힌다.
박찬욱의 이 같은 작품관은 최민식 주연의 ‘올드 보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는데 이 영화는 쓰치야 가론 원작, 미네부시 노부아키 삽화의 일본 원작 만화에서 단 한 가지의 설정만을 가져온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설정이 바로 ‘감금’이었다.
14년 전에 만든 ‘공동경비구역 JSA’를 지금 와서 복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착잡한 일이기도 하다.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사이에 두고 남북한 병사 간 총격전과 살상 사태가 벌어지고 이를 둘러싸고 남북 양측 간에 야기되는 정치군사적 긴장관계와 총격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니, 그런 이야기인 척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남북 젊은이 간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우정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분단 문제를 휴머니즘적인 시각으로 다루는 영화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요즘 같으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북한을 향한 탈북자 단체의 삐라(전단) 살포 문제로 남북한 고위급 회담이 무산되는가 하면 김정은 등 김씨 일가의 왕조적 국가 운영 사태가 세계적 조롱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다.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유엔의 제재 조치가 이어질 전망이고 서해에서는 여전히 이런저런 국지전 양상이 심각하다.
14년 전 박찬욱의 영화가 꿈꿨던 남북한 병사들의 우정은 이제는 마치 전설처럼, 있을 수 없는 우화처럼, 그나마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는 상황이다. 결국 영화는 꿈만 먹고사는 기형적인 나무에 불과한 것인가. 영화는 종종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 세상이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세상이 영화만 같았으면….”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역설의 통일 의지
‘공동경비구역 JSA’를 텍스트만으로 분석하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당시의 한국 영화로는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장르가 융합된, 일종의 복합장르형의 영화였다. 영화는 총 3부로 짜여졌는데, 1부는 총격사건이 벌어지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미스터리 극 형식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중립국 감시위원회 스위스군 소속 여군 장교 소피아(이영애)가 등장한다. 2부는 시점을 뒤로 좀 돌려서 남북 병사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서는 다소 코믹한 장면이 많이 들어간다. 이수혁과 오경필이 서로의 벙커를 오가며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다. 2부는 그래서 한마디로 코미디다.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인 슬랩스틱이 이어진다. 그리고 3부에서는 주인공들의 갈등이 하나의 상황으로 모아지면서 결말로 치닫는다. 분위기가 장중하고 비장한데 일종의 전쟁 드라마인 셈이다.
사건 해결을 위해 남북한 조사단들이 문제가 된 양측 병사들, 곧 이수혁과 오경필을 불러다 놓고 대질 심문을 벌이는 장면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압권 중의 압권이며 배우 송강호가 얼마나 뛰어난 자질을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경필은 그간 형제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누어왔다고 여긴 이수혁에게 난동을 부린다. ‘미제 앞잡이’, ‘남반부 종간나 새끼’ 같은 욕설을 퍼붓고 침을 튀기며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김정일 장군 만세’ 등을 외친다. 그러나 그걸 지켜보는 관객은 안다. 그의 의도되고 과도하게 치장된 충성심은 남한 병사 이수혁을 살리려는 고육지책임을. 이수혁도 살고 자신도 살고, 지금껏 벌어진 사건이 아무런 배경도 없는, 그저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임을 보여주려는 행동이라는 것을. 그래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장면은 ‘공동경비구역 JSA’가 단순히 남북 대치 상황을 그린 분단 드라마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역설의 통일 의지를 담은, 새로운 작품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이 결말 부분에서 열광했으며 그 결과는 관객 580만 명이라는 기록적인 흥행으로 이어졌다. 지금으로 따지면 1800만 명 가까이 모은 ‘명량’의 흥행과 맞먹는 수준이다. 2001년 2월에 열린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도 유럽 관객은 이 장면에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전 세계에 박찬욱이라는 이름을 알린 시발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