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공연 광경을 담은 혜원 신윤복의 ‘상춘야흥(賞春野興)’ [간송미술관 제공]](https://dimg.donga.com/ugc/CDB/SHINDONGA/Article/5b/d7/e6/cf/5bd7e6cf05bad2738de6.jpg)
야외 공연 광경을 담은 혜원 신윤복의 ‘상춘야흥(賞春野興)’ [간송미술관 제공]
“놀라지 마. 사람을 찾고 있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려도 승방으로 간 사미승은 돌아오지 않았다. 실솔은 조심스레 ‘회심곡’을 흥얼대보았다. 차츰 가늘어진 빗줄기는 멈췄고 고요한 산사엔 저물녘 둥지를 찾는 새소리가 가득 찼다. 고개 숙인 채 ‘장진주사’를 가늘게 부르며 손가락 장단을 맞추던 실솔 앞에 비구니 한 명이 다가왔다.
“우리 막내 송귀뚜라미 살아 있었어? 너도 이제 흰머리가 나는구나.”
얼굴을 들어 올리자 비구니가 된 선배 추월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서로 부둥켜안은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다독였다. 산사 아래 민가에 방을 잡고 나란히 툇마루에 앉아 달을 바라보던 실솔이 물었다.
“제가 선배들 제치고 종루 마당에 서던 날 기억하세요?”
웃을 때마다 선배 추월의 눈가엔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녀가 살짝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이세춘(李世春) 가단의 절정기를 어찌 잊을까. 이젠 모두 황천으로 떠나버리고 우리 둘만 남았구나. 실솔인 여태 어찌 살았니?”
실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추월을 향해 평양 가기(歌妓)들에게 소리나 가르치며 조용히 살아왔노라 말하려던 실솔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한때 한양 최고의 가희였던 추월의 손을 어루만지며 아득히 멀어져버린 종루 시절을 떠올렸다.
천하가객 송귀뚜라미
20여 년 전, 한양의 풍운아요 절세 가객이던 이세춘은 종루 공연의 새 주인공으로 실솔을 낙점하며 가단의 선배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우리 가단의 운명은 앞으로 실솔에게 달렸어. 추월이와 계섬이는 누릴 만큼 누렸으니 인자 그 부채 물려주세.”
가단의 대표 가인이 노래할 때 쥐는 부채를 실솔에게 건네던 추월의 손은 가늘게 떨렸고 계섬은 축하의 뜻으로 실솔의 볼에 입 맞췄다. 그렇게 공연 무대에 오른 실솔은 그녀의 별명을 만들어준 ‘실솔곡’을 혼신의 힘을 다해 불렀다. 실솔이 뽑아낸 첫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소곤대는 것 같았지만 본격적으로 목을 쓰기 시작하자 천태만상으로 변주되며 청중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흥이 오른 그녀는 ‘상사별곡’을 부른 뒤 이세춘이 유행시킨 시조창으로 옮아갔다. 잡가 소리에 열광하는 상민들 뒤로 밀려나 있던 양반들이 차츰 앞자리로 몰려들었다. 어떤 이는 눈을 감았고 또 어떤 이는 눈물을 떨궜다.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집고 꿰뚫고 어르고 주물러 제각각의 꼴로 빚은 후 기막힌 변조 위에 태워 허공에 날려버렸다. 한껏 고양된 정서의 파동을 간드러진 꺾는 소리로 거둬들인 실솔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관중이 무대 위로 던진 엽전이 비처럼 쏟아졌다.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을 뒤로하고 무대 뒤 천막 안으로 들어서는 실솔의 볼은 붉게 상기됐고 온몸은 긴장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를 품에 안은 계섬이 속삭였다.
“천하가객 송귀뚜라미야, 이제 네 세상이야. 나 같은 년은 꿈도 못 꿀 소리였어.”
늘 친언니 같던 계섬의 몸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추월이 쓰던 대기실로 다가가 휘장을 걷은 실솔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새로운 여가객의 탄생을 끝까지 지켜봤던 선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계섬이 아무리 위로해도 실솔의 울음은 멈출 줄 몰랐다. 가객 실솔을 만들어낸 스승이지만 소리판에선 둘도 없는 경쟁자였던 이세춘이 다가와 그녀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힘없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실솔은 이세춘을 처음 만났던 몇 해 전을 떠올려보았다.
이세춘과의 만남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그림 ‘소리하는 모양’.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https://dimg.donga.com/ugc/CDB/SHINDONGA/Article/5b/d7/e7/0e/5bd7e70e1c08d2738de6.jpg)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그림 ‘소리하는 모양’.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뭐하는 기생년이길래 목청이 이리 구성진가? 서경기냐 아니면 남원기냐?”
거침없이 외치며 들어선 이세춘은 감히 서평군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평군은 노하기는커녕 그에게 독주 한 사발을 건네며 정답게 말했다.
“후래자 삼배나 이 동지라 한잔일세. 저 계집은 실솔이야, 송실솔. 정가도 할 줄 아는 아이지만 기생은 아니고.”
“기생도 아닌 것이 정가까지 부른다면 나으리 첩실인가?”
껄껄 웃어젖힌 서평군은 이세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자네가 만든 시조창을 가르쳐봤는데 저 아인 그냥 타고났어. 생이지지(生而知之)야. 내 소실로는 아깝단 말이지. 부탁함세. 자네가 거두어 벼리고 벼리면 조선 최고의 가객이 될 걸세. 난 곧 사라질 늙은이지만 세춘이 자넨 아직 창창하잖아?”
실솔을 그윽이 쏘아보는 이세춘의 눈빛은 예리하나 가벼웠고 밝으면서 어두웠다. 자신의 가단을 이끌고 조선팔도를 주름잡으며 명성 위에 명성을 쌓아 더 올라갈 곳도 없었던 가성(歌聖)은 그리하여 몰락한 양반의 씨라는 소녀를 단원으로 거두기로 했다. 이세춘에게 다가가 그의 잔에 술을 따르던 실솔은 마침내 자신의 꿈이 이뤄져 감격했지만 한편으론 서평군과의 이별에 가슴 아팠다. 이세춘 옆에 꿇어앉은 실솔은 달포 전의 일을 떠올렸다.
달포 전, 주위를 물리고 실솔과 단둘이 마주 앉은 서평군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세월을 초월한 실솔의 음악적 동지이자 지음이었던 그는 낮엔 빈틈없는 냉정한 정객으로, 밤엔 재예(才藝)들을 후원하는 한량배로 살고 있었다. 서평군이 어렵게 입을 뗐다.
“너와 연을 맺은 지 어언 3년이다. 소리로 이만큼 즐겼으면 난 되었다. 실솔아. 날 떠나 조선 최고의 소리꾼이 돼보지 않겠느냐?”
고개를 갸웃한 실솔은 그다음 말을 짐작했지만 설렘 속에 침묵했다.
“오직 나만을 위해 3년만 노래해달라고 했던 부탁 기억하느냐? 옳지. 기억하겠지. 아무렴. 이제 기한이 다 찼고 난 네게 정표로 사람 하나를 선물하려 한다.”
실솔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지만 다른 생각으로 마음의 격동을 감싸 안으로 감췄다.
“그자는 이세춘이다. 짐작은 했을 게야. 그의 손을 거치면 넌 반드시 성공할 거다. 다만 워낙 고집 세고 오만하여 내 말도 듣지 않거든. 그러니 우리 꾀를 내보자꾸나.”
서평군은 달포 뒤 성대한 가연(歌宴)을 베풀고 이세춘을 초대할 거라고 했다. 그를 압도하려면 강하고 억센 판소리 창법으로 시조창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서평군은 거문고를 뜯으며 말했다.
“우조로 세게 질러야 한다. 시조창은 세춘이가 만든 거니 녀석 귀가 확 뚫릴 게다. 어디 한번 구성지게 뽑아보자꾸나. 단전을 부풀려 두성을 끝까지 폭발시켜야 해.”
서평군의 작전
서평군과 실솔은 깊은 밤이 되도록 이세춘의 심기를 짓누를 소리를 찾아 헤맸다. 마침내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견고한 시조창법을 발견한 두 사람은 그제야 멈췄다. 서평군이 말했다.“내 이제 세춘이 놈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겠구나. 실솔이 넌 내가 만든 최고의 보검이다. 내가 죽고 없더라도 헛소리하는 세상 잡것들을 다 베어버리거라.”
한껏 만족했던 서평군은 문득 실솔과 헤어질 생각에 울적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실솔이 말했다.
“대감. 우리 재밌는 놀이해요. 제가 소리를 내면 대감께선 거문고로 따라오세요. 먼저 포기하는 사람이 지는 겁니다.”
눈을 반짝인 서평군이 거문고를 고쳐 잡았다. 실솔이 취한 승려를 묘사한 ‘취승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한참 소리를 이어 빼던 그녀가 ‘꽹!’하며 바라 소리를 내자 놀란 서평군이 급히 채를 빼 거문고 배를 두드려 화답했다. ‘황계곡’으로 바꾼 실솔은 닭 울음소리를 이리저리 냈고 서평군은 궁음과 각음을 옮겨 다니며 여음으로 간신히 받아냈다. 노래를 마치기 직전 실솔이 느닷없이 큰 웃음소리를 내자 당황해 허둥대던 서평군이 슬대를 놓치고 말았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그가 물었다.
“바라 소리며 웃음소리는 도대체 뭐냐? 반칙 아니냐?”
“스님들 노래는 바라가 절주를 맞추고 닭이 꼬끼오 울고 나면 반드시 크게 웃는 법이지요.”
실솔의 답변에 크게 웃던 서평군이 천천히 정색을 하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너와 밤새 즐기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구나. 실솔아. 이세춘 가단에 들어가면 주의할 게 하나 있다. 지금 가단의 최고 가인은 추월이와 계섬이야. 소리는 추월이가 앞서고 춤은 계섬이가 절륜하지. 둘 다 기생인지라 어릴 적부터 단단하게 훈련돼 있다. 네가 꺾고 넘어서야 할 산들이다.”
실솔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자 서평군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소리로 추월이를 꺾고 나면 이세춘과 경쟁해야 할 게다. 하지만 걱정 마라. 소리판에 마지막까지 남는 건 나이 어린 네가 될 테니까.”
서평군의 말을 들으며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라고 속으로 생각하던 실솔은 아스라이 3년 전 서평군을 처음 대면하던 때를 회상했다.
소녀 가객의 탄생
3년 전, 만리재 고개를 지나 청파역을 향하는 가마 안에는 소녀티를 막 벗은 실솔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크게 호흡하며 긴장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했다. 가마 밖을 살짝 엿보자 날은 벌써 저물어 금빛 석양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가마는 연화봉 아래 대저택 앞에 멈춰 섰다. 숲에 둘러싸인 저택 주변은 횃불로 환하게 밝혀져 대낮 같았고 수많은 노복이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정문을 지나 중문을 들어설 때 실솔은 가슴이 너무 뛰어 자주 멈춰 서야 했다. 임금님 총애를 받는 종실이자 조정 중신이던 서평군은 젊어서부터 풍류계의 총아로 명성이 자자했다. 젊은 소리꾼이 성가를 높이려면 그의 눈에 들어야 했고 그의 눈에 들려면 어떻게든 그가 베푸는 연회에 끼어 노래로 인정받아야 했다.
정원을 가득 채운 관객은 중앙 연못 위에 마련된 무대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는데 저 멀리 2층 누각 위엔 서평군과 그의 벗들이 좌석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린 실솔에게 그 높이는 천 길 낭떠러지 위보다 멀어 보였고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일까 봐 두렵고 초조한 마음이 만 근 세발솥이었다.
“실솔아. 떨지 마라. 그러라고 널 가르친 게 아니다.”
가마 옆을 걸어서 따라붙던 동네 소리 스승이 속삭였다. 소리 스승은 자신의 제자가 이미 자기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뭔가 끝없이 돕고 싶어 했다. 그런 스승의 치마를 꽉 쥔 실솔이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이 자리에 연줄을 대려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잘 알아요. 걱정 마세요. 목의 힘으론 절대 안 져요. 추월이가 여기에 와도 지지 않을래요.”
실솔은 자기보다 앞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꾼들 모습을 지켜보며 차츰 안정을 찾았다. 대부분 기생 출신인 그녀들은 당대 최고의 가인인 추월이 흉내를 내고 있었다. 흉내만 내서는 이세춘 가단의 꽃 중의 꽃 추월을 이길 수 없었다. 제 차례가 되자 당차게 일어선 실솔은 무대 위로 걸어 나가며 바로 소리를 뽑기 시작했다. 관객은 소리가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 어리둥절했고 누각 위의 서평군도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쓰르라미의 노래
![조선 시대 여성 가객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도리화가’의 한 장면. [동아DB]](https://dimg.donga.com/ugc/CDB/SHINDONGA/Article/5b/d7/e7/61/5bd7e7610135d2738de6.jpg)
조선 시대 여성 가객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도리화가’의 한 장면. [동아DB]
마침내 누군가 다가와 서평군 어른이 찾으시니 누각으로 따라오라고 속삭였다. 실솔은 배시시 웃었다. 누각 위로 오르자 서평군이 소속을 물었고 그녀는 자신이 기녀가 아니라고, 엄연히 양반가 후예라고 말하며 이젠 이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와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실솔의 아버지는 외동딸에게 습관적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가 이리 몰락했다만 엄연히 은진 송씨 반가의 후손이다. 화선아. 내 비록 네 소리 공부를 허락했다만 여느 기생들과 넌 근본이 다른 것이다. 늘 명심해라.”
그럴 때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바람처럼 소리 스승에게로 달려가서 깊은 밤 어둠을 벗 삼아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계곡에서도, 강가에서도, 폭포수 아래에서도, 북한산 절벽에 매달려서도 노래 불렀다. 그 소리가 쓰르라미를 닮았다 하여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쓰르라미라 불렀고 차츰 목청이 트여 ‘실솔곡’을 부르자 실솔이라 불렀다.
쓰르라미 소녀의 집은 한강진과 버티고개 사이에 있었다. 한강변 갈대밭을 누비며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 쓰러지면 파란 하늘의 궁륭이 그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 고사리 같은 손을 하늘에 대고 ‘꽃 화, 신선 선’이라고 제 이름을 속삭이다 또 이렇게 중얼대기도 했다.
“쓰르라미는 무언가 되고 말 거야. 한강진에 세상 사람들을 죄 모으는 추월이처럼 될 거야.”
그러다 보면 하늘은 감청색으로 짙어졌고 숨었던 별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쓰르라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난 가객이 될 거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거야. 도와줘, 별들아.”
※ 이 글은 조선 후기 문인 이옥(李鈺)의 ‘가자송실솔전’을 토대로 했다. ‘가자송실솔전’은 18세기 영조대에 흥성하던 조선 소리 문화의 풍정을 자세히 묘사한 작품이다. 별명이 귀뚜라미라서 실솔로 불린 송실솔은 서평군 등의 후원으로 당대 최고의 여가객이 되었으며 시절가조의 창시자였던 이세춘과도 깊이 교류하며 다양한 음악적 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월과 계섬은 이세춘 가단 소속 가희들로 모두 실존 인물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