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부인은 조선왕실 최초 레즈비언 스캔들의 장본인인 세자빈 봉씨다. 창녕현감을 지낸 봉여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는데, 궁중의 여종 소쌍과 동성애를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세종 18년 10월 26일 기록은 이렇다. “내가 중궁(中宮·왕비를 높여 이르던 말)과 더불어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실록에는 봉씨의 죄목이 질투심이 많고 아들을 낳지 못했으며 남자를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고 적혀 있다. 이는 세종이 자신의 며느리가 저지른 죄목을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세 번째 세자빈은 권전의 딸로, 딸을 낳은 후궁이었다. 권씨는 마침내 아들을 낳는다. 세종은 원손을 얻은 기쁨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런데 사면령을 발표하는 교지 읽기를 마치자마자 의전용 촛불인 대촉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다. 암시였을지 모르지만 권씨는 아들을 낳은 바로 이튿날 세상을 떠난다.
거듭해서 나는 종기

문종의 종기를 책임졌던 전순의는 꿩고기 구이를 문종의 수라에 자주 올리는 결정적 실수를 범했다.
세 번이나 홀아비 신세가 된 문종이 느꼈을 심적 고통과 답답함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종은 유교 원리주의자에 가까웠다. 기쁨과 슬픔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삭였으니 그 마음속의 화가 종기로 분출된 건 아닐까. 세종이 승하한 사흘 뒤인 2월 20일 문종의 증세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전일 난 종기가 낫지 않았는데, 또 종기가 발생했다. 황보인, 정인지 등은 여막(廬幕·궤연 옆이나 무덤 가까이에 지어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살이와 빈객 접대를 하지 말라고 극구 말린다. 아버지의 장례임에도 종기의 증세가 심해 회복을 가늠하기 힘들었다는 방증이다.
즉위년 3월 17일과 22일, 4월 6일, 5월 4일의 기록을 보면 종기에 딱지가 앉으면서 아물어가자 문종은 세종의 빈전으로 가려하고 승지와 대신들은 만류하면서 옥신각신한다.
문종 1년 8월 8일엔 다시 허리 밑에 작은 종기가 생긴다. 11월 14일과 15일엔 종기가 난 부위가 쑤시고 아프다면서 두통까지 호소한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게 거머리 요법이다. 문종은 11월 16일 “어제 아침에는 차도가 있더니, 어제 저녁에는 쑤시고 아파서 밤에 수질(水蛭·거머리)을 붙였다. 붙인 뒤에는 약간의 가려움은 있으나 어제 저녁 같지는 않다”고 했다. 이후 종기가 많이 회복되면서 정무를 재개하는 효험을 본다.
거머리를 이용하는 치료방법을 동의보감에선 기침법(·#54716;鍼法)이라고 한다. “종기가 생겨서 점차 커질 때 물에 적신 종이 한 조각을 헌데에 붙이면 먼저 마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종기의 꼭대기다. 그곳을 먼저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짠 기운이 없게 한 다음 큰 붓대 1개를 종기 중심에 세워놓고 그 속에 큰 거머리 한 마리를 집어넣는다. 다음에 찬물을 자주 부어 넣으면 거머리가 피와 고름을 빨아먹는다. 그러면 헌데의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허옇게 된다. 옹저의 피고름을 빨아먹은 거머리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물에 넣으면 다시 살아난다.”
이런 방법은 독이 심하지 않은 곳에만 써야 한다. 심할 때 쓰면 되레 피만 빨려서 이롭지 않다고 경고한다. 문종 2년 4월 23일, 그는 자신의 질병에 대해 언급하며 회례연(會禮宴·설날이나 동짓날에 문무백관이 모여 임금에게 배례한 후 베풀던 잔치)을 중지할 것을 명한다. “내 병은 급하지 않으니 그 증세(症勢)를 살펴보아서 26일에는 내가 마땅히 친히 나가겠다.”
이후 4월 24일, 5월 3일에 왕의 종기에 대해 다시 거론되나 왕이 종묘사직에 기도를 올리면서 악화일로를 걷는다. 당시 일본에서 사신이 왔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정무를 모두 정지하면서 병이 낫기만을 기다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거머리 이용하는 ‘기침법(·#54716;鍼法)’
문종의 종기를 책임지면서 진료한 의사는 전순의다. ‘식료찬요’ ‘산가요록’ ‘의방유취’를 편찬한 당시 최고 명의였다. 세종 때는 일본에서 사신 일행으로 온 숭태라는 스님이 의술에 정통한 사실이 알려지자 흥천사에 모시고 전순의로 하여금 직접 가서 기술을 배워오게 할 정도로 국가에서 기른 인재였다. 5월 5일 전순의는 “임금의 종기가 난 곳이 매우 아프셨으나 저녁에 이르러 조금 덜하고 농즙이 흘러나왔으므로 두탕(豆湯)을 드렸더니 임금이 음식의 맛을 조금 알겠더라고 하셨다”면서 호전의 신호를 알렸다. 전순의는 5월 8일엔 “임금의 종기가 난 곳은 농즙이 흘러나와서 지침(紙針)이 저절로 뽑혔으므로 찌른 듯이 아프지 아니하여 평일과 같습니다”라고 또 한 번 청신호를 알린다. 지침은 종기 사이에 꽂아둔 종이 심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