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변한 전주의 한 건물 벽면.
전주 인근의 부안군 백산면은 동학군이 흰옷의 의병복을 갖춰 입고 죽창을 들고 집결한 곳이다. 가까운 정읍시의 고부면은 동학군이 봉기를 일으킨 곳이다. 또 태인에서 고부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에 황토현이라고 있다. 황토가 덮인 언덕이라고 하지만 해발 고도는 35.5m로 야트막하다. 이를 통해 태인, 부안, 흥덕, 고창, 장성은 물론 저 멀리 영광, 나주, 함평 등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지방을 휩쓴 동학군이 결국 어디로 몰려들었는가. 전주성이다. 동학군을 이끌고 전주성에 들어선 전봉준은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는 등 ‘전주화약’을 성공시키게 된다. 이 며칠 동안 전주는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자유 도시였다.
이병천 씨는 전주 지역 예술인들과 오랫동안 이 사건을 주목하며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올여름에도 작품 하나를 올릴 예정이다.
“총체극이다. 제목은 ‘가보세 갑오년, 전주성’인데, 총감독을 맡았다. 동학농민혁명의 가치와 의미를 오늘날 생생한 울림으로 되살리려 준비한 작품이다. 동학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날로 시작해 녹두장군, 농민군들이 저마다의 무용담과 애끓는 사연을 풀어놓는 이야기다. 8월 중순까지 한옥마을 공예품전시관 주차장 특설무대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낼 게 아니다. 공연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일회적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과 도모하는 일이 있다. 전주에 동학의 이미지 조형물을 제대로 구현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위인상, 기념비상 이런 거 거창하게 만들려는 계획은 아니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 같은 작품을 구상 중이다. 한양으로 압송되는 전봉준 장군을 실물 크기 정도로, 누구나 걸어가다 마주칠 수 있는 정도로,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사건처럼 그렇게 만들어볼 계획이다. 시를 비롯한 기관과 지역의 뜻있는 분들을 두루 만난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가.

1914년 준공된 전동성당.
그가 힘주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간밤에 보았던 심야의 전주 풍경을 되새겨 보았다. 휴가철이라 사람이 반이요 자동차가 반이었다. 몇 해 전에는, 주말에도 한적하던 전주였는데 이제는 평일 밤에도 불빛과 소음이 압도적이다. 20~30대 여성이 많이 찾는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요즘의 여행, 특히 도시 여행의 풍경이다.
그들은 경기전 바로 앞 상가에서 ‘지팡이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는다. 임실치즈가 들어간 아이스크림, 임실치즈와 다크초코를 버무린 다임 아이스크림 등을 먹는다. ‘길거리야 바게트’도 먹는다. 바게트 속에 토마토소스와 채소, 고기를 다져 넣었다. 떡갈비 완자꼬치도 유행이다. 구운 문어에 소스를 바른 ‘문꼬치’도 문전성시고 수제 추러스 ‘츄남’도 유행이고 전동호떡도 인기 폭발이다.
이런 풍경은, 남자 혹은 가장인 아버지가 주도하는 여행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남자 또는 아버지가 주도하는 여행은 거창한 역사적 서사와 압도적인 자연 풍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거대한 랜드마크를 쉼 없이 뒤쫓아 가는 여행이다.
반면 여성끼리 떠나는 여행은 사뭇 다르다. 작은 가게에 들어가고 들꽃의 향기를 맡는다. 빨리빨리 움직이기보다는 가만 가만히 걷는데, 그렇게 하다가 그냥 앉아 있기도 한다. 거대 역사에 밀려난 일상의 작은 것에 주목한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사람을 본다. 가족이어도 좋고 남자친구여도 좋은데, 대체로는 여자친구다. 그렇게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를 정겹게 하려고 ‘길거리야 바게트’를 먹고 ‘문꼬치’도 먹는다. 아메리카노 한 잔은 필수 아이템!
남성들이 보면, 또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떤다고 할 텐데, 아니다. 그게 아니다. 시간을 잠시 멈춰 세우고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전주한옥마을의 풍경은 그렇게 해서 이뤄진 것이다.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臨淸流而賦詩
그렇게 이야기 나누는 사이에 깊은 밤을 전주에서 보낸 이들이 하나둘씩 짐을 싸서 이 게스트하우스를 떠난다. 이병천 씨는 가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까지 챙겨준다. 아침밥을 나누고, 인사를 나누고 또 한옥의 처마와 담장의 유려한 선을 배경으로 삼아 사진도 함께 찍는다.
그제야 다시 보니, 이곳의 이름이 뜻깊다. ‘귀거래사’, 원래 도연명의 한자로 한다면 마지막 한자는 ‘辭’가 돼야 하는데, 그 마지막 한자를 집을 뜻하는 ‘舍’로 바꾸어 옥호로 삼았다. 도연명은 그의 나이 41세가 되던 405년 마지막 관직인 팽택의 현감을 끝으로 낙향한다. 고향 마을로 돌아가면서 겪은 착잡하면서도 결기 있는 심경을 읊은 시가 ‘귀거래사(歸去來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