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호

노무현 자살 추모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

‘정치 보복’ 항의한 ‘도덕적 죽음’에 현 대통령 잘못 뽑았다는 자책감 폭발

  • 황상민│연세대 심리학 교수 swhang@yonsei.ac.kr│

    입력2009-07-08 1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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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로 현 정권이 정치적 보복을 하고 있다는 견해를 분명히 표시했다. 국민장에서 나타난 광적인 애도의 이면엔 현재의 대통령과 이 사회에 대해 국민이 갖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 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편한 마음을 수증기처럼 만들어놓은 것이다.
    노무현 자살 추모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왜 자살했을까? 검찰 수사와 정권에 대한 항의인가? 아니면, 도덕적 자괴감의 발로인가?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는 마지막 수단이었을까? 죽음으로써 사는 또 다른 길을 택한 것인가?

    노 전 대통령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후 비통한 심정과 달리 자살 그 자체에 초점을 두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아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심정의 표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이 자살 자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가족의 뇌물수수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의 자살을 죄책감이나 불명예에 대한 충동 반응의 하나로 보려 한다. 죽음을 비통하게 여기면서 애도의 뜻을 표하는 사람은 부인 권양숙 여사가 돈을 받은 사실을 정말 몰랐다는 결백을 표현하고자 하는 극단적 표시로 해석하고 싶어한다.

    자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의 경우 부인의 잘못을 자신은 몰랐다고 비겁하게 변명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제대로 행동했다는 자살 옹호론까지 나왔다. 모든 사태의 책임은 노무현 그 자신에게 있고 자살은 그것의 표시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그의 자살에 대한 견해는 다양했지만, 국민의 반응은 분명하고 간단했다. 안타까움, 비통함 그리고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었다. 열광적인 조문 열기는 이런 심정의 반영이었다.



    사실 노 전 대통령의 평소 행적을 보면 그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끝까지 오기와 고집으로 자신을 조여오는 압력을 정치적 압박으로, 그리고 법리적 논쟁으로 끌어갔을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철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약점은 자신이 아닌 타인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가장 크게 흔들릴 때는 자신의 존재와 행위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박해나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다. 자신으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처벌을 받거나 위협을 당한다고 느낄 때, 자신의 존재 이유와 행위의 정당성은 상실되고 만다. 자살하기 직전에 남긴 그의 유서는 이것을 잘 말해준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그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스스로 책임을 지거나 목숨을 끊는 행위가 아니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로 현재의 집권세력이 과거의 집권세력에 대해 정치적 보복을 하고 있다는 견해를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정치보복’에 대한 과감한 승부수

    유서에 밝혔듯이 자신을 따랐던 수족들이 다 감옥에 가고, 자신을 지원했던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 그것은 자신에게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런 경우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표현보다 나 자신의 존재가 없어지면 이런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 믿는다. 자신을 타깃으로 조여오는 정치적 보복에 대해 과감히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검찰을 앞세워 구(舊)권력의 치부를 파헤쳤던 신(新)권력은 우리 사회에서 권력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알려주었다.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였던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와 그 과정에서 나온 비자금 사용자료는 권력이 가질 수 있는 무기다. 이것을 근거로 과거 정권의 핵심과 친인척과 측근들을 압박했던 현 정권의 사정 노력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는 검찰 출두라는 형식도 전직 대통령이 경상도 말로 ‘쪽 팔리는 상황’을 확실히 경험하게 했다. ‘스스로 면목 없는’ 모습이라고 토로했듯이, 권력의 대리인의 노릇을 충실히 했던 검찰의 조사방식은 범죄 혐의가 무엇이든 간에 어떤 처벌보다 확실한 징벌적 효과를 발휘했다. 적어도 노무현 그 사람에게는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자살이라는 선택으로 정치적 보복의 의미를 갖는 권력의 탄압에 승부수를 던졌다. ‘너희 중 누구 죄 없는 자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성경말씀보다 ‘죄가 있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속세의 믿음을 맹신했던 검찰이나 집권세력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과거의 정권과 현재의 집권세력이 가진 코드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를 잘 보여준다. 검찰이나 현재의 집권 세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이나 출세, 또는 사회적 인정을 위해 전력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에 비해 과거의 집권세력은 지켜보는 사람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찾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공동체의 가치와 변화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학습의 가치를 신봉했다. 자신들의 모임을 ‘열린 우리’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의 표현이었다. 물론 그들과 코드가 달랐던 또 다른 사람들에게 과거의 집권 세력은 ‘닫힌 저그들’이었다. 노무현은 그들의 대표자였다.

    노무현 자살 추모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러 봉하마을을 찾은 국민들.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 국민은 애증의 감정이 엇갈리는 경험을 했다. 불쑥불쑥 질러대는 그의 말에 국민은 놀라기도 했고 또 힘들어했다. 때로 어이없어 하기도 했고, 미워하기도 했다. 대통령 시절의 그는 안타까운 존재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 국민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뜨거운 열기로 추모의 마음을 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부르짖었던 그였지만, 그와 생각을 공유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는 규범을 벗어난 ‘파격’ 그 자체였다. 이것은 물론 그의 독특한 심리구조에 근거한다. 그는 사회의 대세를 따르기보다 스스로 대세를 만들어내려 했다. 기존의 사회 규범과 질서에 따르기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틀에서 벗어나는 그의 언행과 행동은 기성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보수언론에는 눈엣가시가 되었다. 심지어 그가 ‘반사회적 심리상태’에 있다고 몰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심리상태는 반사회적이기보다는 ‘아웃라이어’였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

    비주류의 심리상태를 가진 그가 대통령으로 발휘한 리더십은 ‘괴짜형’이라 할 수 있다. 풍부한 상상력에 기초한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마니아 집단을 유지했다. 이 스타일의 정치인은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런 성향은 때로 장점이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는 예측하기 힘든 행동을 한다고 느끼는 결과를 빚는다. 어렵게 자수성가한 사람의 독선적 모습으로 해석된다. 이런 사람들은,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겠지만, 자기 합리화에 능하다. 이와 동시에 상황에 따라 한방에 대중의 마음을 잡는 감동 드라마를 만들기도 한다. 상식과 규범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파격적인 언행은 무조건 싫다는 혐오감을 유발하는 분명한 자극이었다.

    과거 권위적인 대통령의 모습에 익숙했던 대다수 국민에게 노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변화는 대체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대중과 소통하려는 그의 모습은 오기와 고집으로 자신의 정치적 소신만을 고집하는 경박함으로 부각되었다. 재임 시절 국민은 일상의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날 때면 ‘노무현 탓’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이후에 우리가 대통령을 선택하는 상황에서 “당신만 아니라면, 그 누가 우리 리더가 되어도 좋다”라는 마음이 되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인지 살펴볼 필요도 없이 “경제를 살리고, 잘살게 해주겠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은 그가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바뀌자마자 전혀 달라졌다. 은퇴한 정치인, 또는 전직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편안하고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가 되었다. 국민은 인간적이며 대중과 소통하는 훌륭한 리더의 전형을 그에게서 다시 발견하고 즐거워했다. 그가 낙향한 봉하마을은 수십만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살았어요’라는 옛날이야기의 결말처럼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운명의 손길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그 순간부터 그의 죽음은 ‘서거’로 표현되었다. 전직 국가원수의 죽음이라 서거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자살을 서거라는 단어로 포장한 것 자체가 이 죽음의 정체를 잘 나타낸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 또는 ‘곤혹스러움’의 상징이다.

    그의 자살 소식에 시민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몇 시간씩 기다려 조문했다. 마지막 거처였던 봉하마을을 찾은 조문객 수는 100만에 달했다. ‘산 노무현’을 조롱하고 비난한 국민이 ‘죽은 노무현’을 급속도로 기리는 군중심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추모열기는 그에 대한 정치적 압력, 또는 검찰 조사를 그냥 지켜보기만 했던 행위에 대한 자책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대중은 마치 집단 망각증에 걸린 것처럼 과거의 노무현을 미화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와 같은 대통령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아쉬움까지 나타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비통해 하고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애달프게만 느끼는 사람들의 조문이 대세를 이루었다. 조문열기 속에 대중은 그가 뇌물수수 의혹으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렸다. 아니, 그것을 언급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뇌물수수가 아니라 정치적 탄압으로 해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보통 ‘비통’ ‘충격’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할 때 대중은 정신적, 심리적 손상을 받았다. 이런 표현은 자신이 경험하는 충격의 정체를 분명히 정의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혼란스러움을 담고 있다. 모두 슬픔을 이야기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슬픈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이런 성격의 충격적인 경험은 심리적 내상(internal damage)으로 남는다. 겉으로 상처를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기에 대중은 급격한 집단행동으로 바로 폭발하지는 않는다. 단지, 수증기가 계속 생겨나는 밥솥처럼 압력이 조금씩 쌓일 뿐이다. 조금씩이라도 그 내적 압력이 김으로 분출될 수 있다면 폭발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내상이 만들어내는 군중 폭발의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분명 사태 초기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르면서 국민은 그 사람과 그 주변사람들의 행적을 비판했다. 하지만 개인 비리처럼 보였던 사건이 노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하는 순간부터 현 정권이 ‘인간에 대한 예의’나 ‘정도를 넘은 수준’의 부당한 짓을 하고 있다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노무현 자살 추모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

    봉하마을을 출발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운구 차량.

    ‘털어 먼지 안 나는 인간 없다’라는 게 상식인 나라에서 검찰 출두는 그 자체로 정치적 압박의 신호다. 그것이 점차 ‘좀 비열하다’ ‘인간으로서 예의가 아니다’라는 마음으로 공유될 때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죄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라는 동정론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그의 죽음은 동정론을 대세로 만들고 그의 삶은 또 다른 신화가 되었다. 이런 대중의 반응에 대해 ‘뭐, 자기가 지은 죄가 있으니까 그게 창피해서 자살한 것이지’라는 언급은 조용히 사라져야 했다. 심지어 ‘수천억원을 해먹은 이전 대통령에 비하면 이것은 정말 억울하다’ ‘일반적인 정치인의 행태로 보았을 때 이것은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법적 판단이 아닌 일상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 도덕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다’ 따위의 이야기까지 나왔다.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보복과 탄압의 행위를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대중이 스스로 만들어낸 회한과 자책감, 그리고 미안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일종의 ‘자기 정당화(self justification)’이자 자기 합리화가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었다.

    사상 초유의 전직 대통령 자살은 현재의 대통령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는, 딱 꼬집어 이야기할 수 없는 막연한 불만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유발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이 현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보는 시각은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다.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현재의 권력집단으로서는 억울할 수 있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 대중의 반응이다. 국민과 잘 소통하지 못한 잘못은 인정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큰 잘못은 저지른 것이 없다고 믿기에 조금은 답답하고 야속할 것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자살과 관련된 대중의 반응, 특히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왜 그가 죽었는가에 대한 대중의 질문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는 분명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상황을 이해하는 심리가 있다.

    역사박물관 빈소가 한산했던 이유

    현재의 대통령이 지난해 취임한 이후 국민은 기대를 많이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촛불시위로 인해 실망으로 바뀌었다. 특히 공안정국에 가까운 정치권력을 발휘하는 상황은 전직 대통령이 주장했던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느끼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민심의 이반 현상은 바로 조문행위 그 자체에서도 잘 드러났다.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역에는 정부분향소가 마련돼 있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시민분향소가 있었다. 시민들은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는데도 덕수궁 앞으로만 몰렸다. 영결식이 끝난 이후에도 대한문 앞의 시민분향소에는 여전히 가신 분을 추모하는 행렬이 계속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이 죽음을 유발한 것이 정부 또는 현재 국정을 책임진 사람이라고 보는 시각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정부가 이런 사태를 만든 주범인데, 주범이 만든 빈소에 추모를 한다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다, 이런 심리의 표현일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돌아가신 그분과 대비되면 될수록, 현재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스러움은 조금씩 커진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두고 싶었던 그분이 돌아가셨으니까 한편으론 돌아가신 것에 대한 원망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돌아가셨다’라는 데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앞으로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의 상실이라는 느낌도 표현된다. 일반 대중의 심리상태다.

    그 심리의 밑바닥엔 현재의 대통령이 뭔가 좀 잘해주기를 바라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조금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에는 실망이 너무 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노 전 대통령 영결식 이후 국민 마음속에 이런 막연함과 허탈함이 만들어내는 불만의 수증기는 조금씩 쌓이고 있다.

    자살은 분명 미화될 일이 아니다. 현재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열기는 자살에 대한 미화는 결코 아니다. 사회지도급 인사의 자살, 그것도 전직 대통령의 자살은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것이기에 이 자살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해석하고 논의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의 자살을 단순히 ‘무책임하지 않은가’라고 비난하거나 폄하할 것은 아니다. 그의 자살은 정치적 보복이라고 보이는 권력의 횡포에 대해 스스로 이것을 분명히 알리겠다는 저항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기에 내상에 의한 아픔을 조금씩 풀어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 전체가 뿜어내지 못한 수증기로 꽉 닫힌 밥솥 상태가 될 것이다.

    오늘의 이 시점을 민주주의의 후퇴로 본다는 교수와 시민단체들의 성명이 나오고 있다. 이 와중에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또 다른 교수와 단체들의 성명들이 발표되고 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강남과 강북에 사는 인간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을 구분하는 편 가르기를 했다고 지적했던 언론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언론매체도 현 정권에서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편 가르기 현상이 심각하다는 지적은 하지 않는다. 대중의 마음속에 가해자 피해자라는 구분이 만들어졌고 그것을 융합해야 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과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몰고 올 사회적 파장은 일반 국민 사이에서 그의 죽음이 누구에 의해 벌어진 것이냐를 두고 논란이 일 때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아무런 언급 없이 조용히, 혹은 슬쩍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집권세력이 바라는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국민의 마음속에 현 집권세력의 정당성, 또는 신뢰성 문제가 점차 부각될 것이다. 바로 현재의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가, 그가 과연 국민을 위해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아니면 억지로 국민이 이런 상태를 참고 견디면서 지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부각될 것이다.

    우리를 부끄럽게 한 그 사람

    역설적으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정말 우리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다 죽은 전직 대통령이 우리에게 이런 어려운 고민을 던져주었을까? 그것은 바로 국민이 과거에 한 선택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고 후회하는 심정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한동안 혼란스럽게, 또 이해할 수 없는 채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좋은 집안이 아니더라도, 못 배우더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혼자만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살지 않아도, 또 부자가 안 되어도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남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보여준 것이 얼마나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지를 다시금 느끼게 했다.

    그는 우리에게 삶이란 혼자 잘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삶에 자극이 되거나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이 사회, 이 나라를 바꾸는 일은 누가 우리를 위해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미래를 암담하게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그냥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준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그의 죽음을 통해 자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지향한 가치가 무엇이며, 자신이 꿈꾸었던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다시 알려주었다.

    서거 이후 국민장에서 나타난 애도의 물결을 전직 대통령이나 소탈했던 대통령에 대한 단순한 추모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면엔 현재의 대통령과 이 사회에 대해 느끼는 국민의 불안이 깔려 있다. 내부에 쌓인 갈등의 증기를 어떻게 바깥으로 안전하게 분출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그 통로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증기를 조금씩 분출시킬 수 있는 신뢰할 만한 통로가 없다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 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편한 마음을 수증기처럼 만들어놓은 것이다. 앞으로 이런 수증기의 압력이 갑작스럽게 분출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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