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 요직이라는 그룹 계열사의 건설사로 가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이권에 휘말리는 게 싫기도 했고, 자신에게는 ‘판매’가 적성이라고 판단해서 (주)기산으로 돌아온다. 그는 한때 ‘정치 서비스를 판매하는 일’에도 관심을 보였다가 친인척 배제 방침에 따라 정계입문의 꿈을 접었다. 그는 문민정부 시절 OECD 가입이 시기상조라고 드러내놓고 비판했고, YS가 “재산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 고통을 주겠다”고 다소 덜 다듬어진 발언을 했을 때에도, 떳떳한 부자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청부론(淸富論)’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상도동에는 자주 가십니까?
“주로 명절 때나 돼야 한 번씩 가지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만나기 때문에 인사 정도 나누고 오는 게 전부예요.”
―저는 외동딸과 결혼하는 바람에 동서가 없어서 아쉽습니다만, 동서지간이면 무시로 만나서 소주도 한 잔씩 하고 속엣얘기도 나누고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야 뭐…. 만난다고 해봐야 정치 문제는 그쪽이 전문이니까 조언을 하지도 않고, 또 시시한 조언을 해봐야 소신이 워낙 강한 분이 돼가지고 말 들을 사람도 아니어서 함부로 얘기를 안 하지요. 하지만 OECD 문제나 자동차 산업 증설문제에 대해서는 반대를 좀 했지요.”
―또 기아 얘긴데요, 기아가 어렵게 된 데에는 삼성 쪽의 표면적인 혹은 이면의 공세가 작용했던 것 아닌가요?
“잘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혐의를 피할 수 없겠지요.”
―자동차 얘기 나온 김에, 삼성자동차 허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사실 노태우 정권 때 삼성이 대구지역에 상용차를 허가받았단 말예요. 그러나 상용차만 가지고는 경쟁력이 없습니다. 혹이 되는 거지요. 문민정권이 들어서자 거기에 대한 갈등이 있었을 거예요. 상용차를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승용차를 해주자니 과잉중복 투자 문제가 생기고. 사실 다른 후진국에서 자동차 생산을 여기저기 허가했다가 자동차 산업 자체를 죽인 경우가 많아요. 딴 건 둘째 치고 전통(전두환 대통령)이 자동차 허가를 안 해준 건 잘한 겁니다. 삼성자동차 허가 문제는 사실 김 전 대통령도 초기에는 반대했다, 나는 이렇게 봅니다. 삼성으로서야 죽기 아니면 살기로 추진을 했고, 또 하필 김해의 갯벌 바닥을 부지로 삼았던 게 문제였는데, 당시 TK 정서가 나빠진 상황에서 부산까지 나빠지면 다 죽는다, 이렇게 됐을 겁니다. 정치 논리가 앞섰지요. 이건 그냥 하도 안타까워서 나 혼자 추리를 해보는 건데…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삼성차를 허가했는지를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하여튼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만약’이라는 가정이야 부질없는 것이지만, 그는 당시에 기아가 경영권 일부를 양보하고 삼성도 독식할 생각을 하지 않은 가운데, 노련하게 투자 합의를 해서 협력체제를 이뤄냈더라면 ‘윈-윈’의 성과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최근 들어 부질없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했다.
어릴 적 피란지 대구에서 김우중과 신문 가판 경쟁
경북 칠곡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장사에 대단한 수완을 과시했다는데, 어린 시절 그의 ‘대포바퀴 손수레’ 이야기는 이미 그의 주변에서 꽤 유명해진 일화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전쟁이 터지자 모두 대구로 피란을 떠났다. 피란지 대구에서 그는 신문 가판을 했다.
“석간신문을 지국에서 받아다가 돌아다니면서 팔았는데, 10부를 떼어다가 팔아봤더니 너끈하게 팔린단 말예요. 그래서 20부를 떼왔지. 그런데 밤늦도록 팔아봐야 열서너부 이상 안 팔려요. 지국에서는 10부 단위로만 신문을 내주거든요. 신문 가판이 내가 판매일선에 나섰던 첫 시도였는데, 난 경영에 실패를 한 거예요. 신문 판매는 타이밍이 중요하거든요. 시간 지나면 가치가 없어져버린단 말입니다. 자동차 모델도 유행 지나면 팔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그런데 김우중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에 보면 김씨도 바로 그때 대구에서 똑같은 상품(신문)을 팔았는데, 그의 신문 판매 방식은 달랐다. 신문을 들고 주택가 부촌(富村)을 돌면서 집안으로 그냥 집어던지고 분필로 체크해 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오전에 수금을 하러 다니는 방식이다. 구매자가 막연한 상태에서 ‘신문 사세요!’를 외치고 다니는 도재영의 판매방식이 막막하고 원시적이라면, (정도 판매라 할 수는 없으나) 수금이 될 만한 집을 골라 무조건 집어던진 다음에 이튿날 돈을 받아내는 김우중 방식은 애당초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씨가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공개석상에서 도씨가 그를 일컬어 ‘이재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했던 것이 바로 그 대목을 두고 한 얘기다.
“당신은 이재에 밝은 천상 장사꾼인데 정치는 무슨 정치냐, 이런 조롱의 뜻으로 그런 발언을 했던 겁니다.”
도재영의 고향은 칠곡군에서도 사방에 돌덩이만 풍성한 깡촌, 석적면(石積面)이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그는 중학 입학자격 국가고사에 응시했는데,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부친으로부터 ‘1년 쉬어라’라는 통고를 받는다.
“장남인 형님이 대구사범에 진학을 하게 된 마당에 차남인 나마저 상급학교에 갈 형편은 못 됐던 거지요. 1년 동안 농사를 지으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어요. 경제적 형편이 문제라면 내 힘으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실천에 나섰지요.”
도재영은 마을 야산에 버려져 있던 인민군의 대포에서 쇠바퀴를 떼낸 다음 소나무를 베어서 바퀴를 전깃줄로 동여매어 훌륭한 대포바퀴 손수레를 만들어냈다. 열네살 때였다. 부친으로부터 밑천을 얻은 그는 과일을 떼어다 팔기 시작했다. 대포바퀴를 동원한 손수레 과일행상은 성공적이었다. 신문 가판이 큰 경험이 됐다. 그는 당당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입학금을 마련해서 왜관에 있던 가톨릭 계열의 순심중학에 입학한 것이다.
중학은 그렇게 마쳤는데 이번엔 고등학교 진학의 길이 막막했다. 그는 철도고등학교에 가기로 작정을 한다.
“철도고등학교 가면 학비도 면제되고, 밥도 먹여주고, 기차를 언제든 공짜로 탈 수 있다는 얘기에 매력을 느꼈지요. 전쟁 바람에 너도나도 피폐했기 때문에 국비로 다닐 수 있는 철도고등학교의 입학경쟁이 대단히 치열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학원서를 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학교에서도 못 구하고 아버지도 백방으로 뛰어다니셨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어요.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무턱대고 기차역으로 달려갔어요. 역장은 높은 사람이니까 못 만나고 조역(助役)이라고 불리던 역무원을 만났어요.”
도재영이 말했다. “아저씨, 나는 왜관 순심중학교 3학년 B반 급장 도재영입니다. 다른 애들은 헌병이나 경찰서장이 되고 싶다지만 나는 아저씨같이 금테모자 쓴 철도 공무원을 최고로 존경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철도고등학교에 가야겠는데 입학원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66년 공채에서 ‘기아맨’으로 출발
역무원은 그 기특한 꼬마의 청을 뿌리칠 수 없었던지 비상전화를 통해서 입학원서를 철도우편으로 급송하라고 했고, 그 덕분에 그는 철도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원서 접수 역시 서울에 가지 않고 철도편으로 해결했다. 학교에서도 구하지 못한 원서를 거뜬히 구해서 접수까지 마쳐버렸으니 그의 수완에 마을 사람들과 학교 교사들도 혀를 내둘렀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되는 위기상황이지만, 오히려 위기였기 때문에 대포바퀴를 구해서 과일장사를 할 수 있었단 말입니다. 철도고등학교 입학원서를 구하는 일은 학교 선생도 포기를 했지만 다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그저 듣기 좋은 구호만은 아니에요.”
도재영이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이른바 ‘사바사바’로 상징되는 부패가 판을 치던 세상이었다. 당연히 철도고등학교 졸업생 몫으로 주어져야 할 철도공무원 자리를 외부 사람들이 ‘빽을 써서’ 꿰차는 바람에 그는 취직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아버지와 흥정했다. 1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을 테니 대학 입학금을 내놓으시오.
1년 동안 농사지으면서 재수 아닌 재수를 한 뒤에 들어간 곳이 한양공대 기계과였다. 도재영은 59년도에 대학에 들어갔다가 입학 8년 만인 67년도에 졸업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도중에 휴학도 하고, 군대도 갔다 오고, 제대하고 서도 1년 동안 군대 문관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재학중이던 66년 11월에 기아산업 공채에 합격하면서 ‘기아맨’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도씨가 기아 그룹 부회장에서 퇴임한 후에 별 망설임 없이 정수기 외판에 나서겠다고 자원할 수 있었던 것은, 쉬운 일 같지만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소년시절부터 온갖 진창을 야무지게 굴러온 그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자동차 생산 기사로 입사했을 당시는 기아마스타라는 이름으로 나온 소형 삼륜화물차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다. 그러니까 그는 60년대의 삼륜차부터 최근의 엔터프라이즈까지를 생산 혹은 판매하는 데 간여해온, 기아 자동차의 산 역사인 셈이다.
그는 생산부장을 하다가 엔지니어 출신으로서는 제1호로 점소장(店所長)으로 나가게 됨으로써 신문 가판과 과일행상으로 이어진 그의 적성을 찾아 ‘판매 인생’의 본류로 돌아온다. 이미 재직중에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과정을 이수했던 걸 보면 언젠가는 영업파트로 옮겨 앉을 준비를 꾸준히 해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삶에서 기아에서의 30년은 전설로 남게 되었다.
‘네트워크 판매’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중
―사람들은 좀 잔인한 취미가 있어서 ‘기아 부회장 지낸 사람이자 전직 대통령의 동서가 정수기 외판원 하고 있다’는 화제의 한가운데에 오래 있어주기를 바라는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1년만 하고 그만두셨는데요?
“애당초 10개월만 하자고 계획을 하고 시작했던 일입니다. 정수기 판매를 했던 것이 신문 가십 기사거리 제공하려고 한 게 아니고, 내 판매 인생의 긴 과정 중에서 무뎌진 현장감각을 되찾자는 의도였습니다. 나는 충분히 목적을 달성했고, 이제는 이곳 ‘한초’에 와서 ‘네트워크 판매’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취급하는 상품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시외전화와 국제전화를 기존 통신업체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연결시켜주는 통신서비스 공급회사라고 보면 됩니다. 판매 방법이 일종의 다단계 방식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판매 시스템을 곱게 보지 않는 문화가 뿌리 깊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다국적기업인 ‘암웨이’에게 다단계 판매시장을 점령당한 것 아닙니까. 이 회사는 정보통신부로부터 정보화 촉진기금 사업 대상자로 선정될 만큼 이 분야에 대단히 유망한 벤처기업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경영주(한의상 회장)의 의식이 건강해서, 이곳에서라면 내가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판매방식에 대한 실험을 해볼 만하겠다고 판단한 거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한, 정도 판매의 길로 나아가게 돼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다시 청부(淸富)를 얘기한다. 그는 이 회사에서 판매원들에 대한 교육을 주로 담당하지만, 그 스스로 가방을 메고 판매 일선에 나서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뭐든 팔고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이야기를 마치고 된장찌개를 파는 회사 인근의 식당에 함께 들렀는데, 보리차를 갖다주는 주인에게 그는 습관처럼 “이 식당에도 정수기 하나 있어야겠다”고 말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IMF라는 모진 상황을 맞아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누렸던 헛거품의 실속 없음을 저리게 체험했다. 도재영씨는 ‘내가 왕년에 누구였는데’라는 허세를 앞장서서 걷어내 보인,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데에 너무 늦었다는 법은 없다’는 도전 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준 환갑을 넘긴 젊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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