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슬람주의자들은 ‘외국 군대를 신성한 땅에 끌어들인 사우디 왕가는 성지 수호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빈 라덴은 여전히 사우디 왕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이었다. 사우디 정부가 미군을 끌어들인 것은 공포 때문이며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물러나면 다시 이슬람의 길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사우디 정부는 이러한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1991년, 이라크군이 퇴각한 후에도 미군 주둔은 계속됐다. 빈 라덴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했다.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지닌 그는 이제 사우디 왕가에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 사우디 정부는 비판을 멈추라고 압력을 가했다. 처음에는 빈 라덴 가문의 기업들과 맺은 공사를 모두 파기하겠다고 협박했다. 이것이 먹혀들지 않자 빈 라덴의 전재산을 몰수하고 집안의 모든 사업체를 파산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신변마저 위태로워진 빈 라덴은 1991년 여름, 가족을 데리고 수단으로 망명했다. 수단은 1989년 이슬람교도인 바쉬르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한 후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같이 이슬람 성직자가 통치하는 국가를 지향했다. 수단의 종교지도자 하산 알 투라비는 ‘수단의 호메이니’였다. 때문에 전 이슬람세계에서의 이슬람국가 건설을 목표로 정한 빈 라덴에게 수단은 활동하기 좋은 곳이었다.
수단에서 빈 라덴의 역할은 다양했다. 그는 수단의 외자 유치통이자 이슬람 전사를 키우는 무자헤딘 지도자였다. 고속도로를 닦고 농업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등 수단 경제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검소했다. 그의 초청으로 수단을 방문한 빈 라덴의 친구이자 사우디 억만장자 할레드 알 파우히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집과 생활수준을 본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집에는 냉장고, 에어컨도 없었다. 자동차도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 것도 없었다.”
라덴, 미국을 비웃다
빈 라덴은 수단의 대외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위상은 단순한 망명자가 아닌 전 이슬람권을 상대로 이슬람주의 운동을 벌이는 인물이었다. 국제적인 사업망 구축은 이를 위한 유효한 수단이었다. 그는 이슬람 세계 내 친미 정권이 아니라 미국을 직접 상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의 첫번째 대결은 소말리아에서 벌어졌다.
1992년 12월, 2만8000여 명의 미군이 기아 상태의 소말리아 국민을 구호한다는 명목으로 소말리아에 상륙했다. 소말리아는 부족간 내전으로 황폐해져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수단·에티오피아·소말리아 등 동아프리카 지역은 이슬람권에 속한다. 수단에 기반을 둔 빈 라덴의 지하드 조직 ‘알 카에다’는, 미군의 소말리아 진입을 이슬람세계 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보았다. 아라비아 반도와 페르시아만 일대에 이어 동아프리카조차 장악하려는 속셈이라 판단한 것이다. 알 카에다의 파트와(이슬람 칙령) 위원회는 소말리아의 미군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12월 말 미군이 투숙한 예멘의 한 호텔에 폭탄 공격이 있었다. 이들 미군은 소말리아로 가는 길이었다.
미군은 미국을 적대시하는 소말리아의 여러 부족과 교전했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부족 지도자인 모하메드 아이디드를 제거해야 평화가 정착되리라 보고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대가는 값비쌌다. 1993년 초, 빈 라덴의 군 조직 사령관인 아부 하프스는 소말리아인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도 제공했다. 1993년 10월,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이틀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아이디드를 잡으려다 18명의 전사자를 냈다. 뿐만 아니라 로켓 발사기로 날아온 수류탄에 블랙호크 헬리콥터 여러 대가 격추당했다. 헬리콥터 격추는 소말리아 부족 병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일주일도 안 돼 미국 정부는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미군의 소말리아 철수에 빈 라덴이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빈 라덴은 그의 부대가 참전한 것을 확인해 주었다. 1998년, 파키스탄 언론인에게 그의 측근 하미드 미르를 소개하면서 “소말리아에서 내 부대를 지휘한 사령관으로 미군 헬리콥터 1대를 격추했다”고 말한 것이다. 1999년 알 자지라TV와의 인터뷰에서는 “소말리아에서의 전투를 통해 우리는 그들(미군)의 나약함을 알았다. 겨우 18명이 전사하자 캄캄한 밤에 달아났다”고도 했다.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1995년 11월13일 리야드의 군사훈련센터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다. 같은 해 11월19일에는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이집트대사관에 폭탄 트럭이 돌진해 19명이 죽고 6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빈 라덴의 활동으로 여긴 미국, 사우디는 이집트와 더불어 빈 라덴을 추방하라고 수단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특히 사우디는 추방 대가로 수단에 막대한 경제원조를 제의했다. 빈 라덴은 수단 정부와 협상해 1년의 준비끝에, 1996년 5월 3명의 처 등 가족을 데리고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주했다. 미리 아프가니스탄에 간 조직원들은 이미 이슬람전사 훈련소를 가동시키고 있었다. 빈 라덴은 발칸 이슬람 전사단과 아랍 이슬람 전사단을 조직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군 철수후 각 이슬람 정파간의 내전으로 혼란을 겪었다. 그 가운데 1995년, 빈 라덴과 파키스탄 정보부가 양성한 이슬람주의자 조직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95%를 장악하였다. 탈레반 지도부는 빈 라덴이 이슬람 전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한 때에 동고동락한 사이다. 빈 라덴이 입국하자 탈레반의 한 고위 인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빈 라덴을 환영했다.
“오, 셰이크(이슬람 종교지도자를 지칭하는 말)시여! 우리 땅은 아프간인의 땅이 아니라 신의 땅이며 우리의 성전은 아프간인의 성전이 아니라 모든 무슬림의 성전입니다. 전 아프간 지역에서 당신이 지도한 순교자들이 활동했습니다. 그들의 무덤이 이를 증명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밟은 흙마저 축복합니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해발 8200피트(2499.36m)에 위치한 그의 사령부는 지구 어느 곳과도 교신 가능한 통신장비, 발전기, 컴퓨터, 막대한 정보량을 저장한 데이터 베이스 컴퓨터 등을 갖추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이주 후 빈 라덴의 활동 폭이 오히려 커졌다. 1991년 구소련 붕괴후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에서도 이슬람이 부활했다. 빈 라덴은 발칸반도에서 학살되는 무슬림을 구원하려 이슬람 전사단을 파견하였다.
빈 라덴의 조직은 이전의 이슬람 테러 조직과 질적으로 다르다. 우선 전세계에 뻗어 있는 그의 사업체가 조직의 인프라라 할 수 있다. 테러조직과 사업체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기업의 효율성이 테러 목적으로 전용되었을 때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만큼은 입증이 되었다. 또한 무엇이 빈 라덴의 조직인지를 가리기도 쉽지 않다. 빈 라덴은 세계 이슬람주의 조직을 후원·지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빈 라덴은 이슬람주의 조직 전체를 대표한다. 이란 정보부, 파키스탄 정보부 등 여러 이슬람교 국가의 정보조직이 그를 돕고 있으며 이슬람권 국가의 고위관리 가운데도 많은 협조자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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