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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정치 주름잡는 환상의 투톱 블레어와 브라운

영국정치 주름잡는 환상의 투톱 블레어와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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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노동당과 보수당의 처지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는가. 사실 정책 내용으로만 본다면 블레어 노동당 정부의 ‘뉴 레이버리즘’과 메이저 보수당 정부의 ‘포스트 대처리즘’은 쉽게 구별이 되지 않는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지금까지 토니 블레어의 최대 공적으로 꼽히는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해법을 제시한 이는 블레어가 아니라 메이저다. 바둑으로 치자면 블레어는 메이저가 깔아놓은 북아일랜드 포석의 끝내기 단계에 뛰어들어 깔끔하게 뒷마무리한 셈이다. 현재 블레어가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영국의 2002년 유로화 가입에 대해서도 정책 차이는 별로 없다. 블레어와 마찬가지로 메이저도 유로 참여를 대세라고 본 정치인이다. 다만 메이저는 유럽통합 회의론자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영국 보수당 안에서 그것을 밀어붙일 힘도, 국민에게 이를 설득시킬 만한 인기도 없었다. 이것이 메이저의 한계이자 불행이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완벽한 호흡을 맞추어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전쟁에 뛰어든 블레어의 행보는 1991년 걸프전 때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과 어깨를 같이 하고 전장에 달려가 병사들을 격려한 메이저의 행보와 다를 바 없다. 유럽에서 영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과 가장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블레어는 자랑하지만, 그 열매 또한 대처리즘의 성과물이라는 것을 노동당도 쉽게 부인하지는 못한다.

물론 블레어의 신 노동당을 포스트 대처리즘의 연장, 또는 재포장 상품쯤으로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그러나 포스트 대처리즘과 뉴 레이버리즘 사이에 분명한 단절이 있다고 보는 것은 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신 노동당이 대처리즘의 부정이 아니라 대처리즘의 재방문(revisit)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지금 노동당 정부를 이끄는 이론가들이 내세우는 수사학 중 하나다.

노동당 성공의 비결은 상호보완적인 두 젊은 정치인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각자 가지고 있는 매력, 그리고 그 둘이 하나로 뭉쳤을 때의 승수효과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블레어는 현실정치 속에서 정치적 꿈을 호소하는 이상주의자다. 그는 밝고 건강하다. 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 속에서 영국 국민들은 미래의 희망을 읽는 것처럼 보인다. 부끄러워하는 듯한 그의 표정에서 영국 국민은 그의 선의를 읽는다. 그는 언론으로부터 한때 ‘무오염(無汚染, sleaze-free)’ 정치인이라고 불렸다. 보수당 정치인들의 ‘슬리즈(정치뇌물수뢰)’ 사건이 잇달아 터져나왔을 때 얻은 별명이다. 블레어의 말은 화려하다. 그의 화려한 수사는 존 F 케네디의 1960년대 하버드대식 수사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메시지가 간결한 때문인지, 말장난한다는 느낌은 별로 주지 않는다.



한편 브라운은 정치적 이상을 현실 조건에서 철저히 따져본다. 블레어가 9·11 테러 이후 반테러리즘의 국제연대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아프간에 영국군 참전을 신속하게 결정했을 때, 브라운은 지상군 참전을 위한 조건을 먼저 따졌다. 블레어가 2002년 영국의 유로 가입의 당위성을 이야기했을 때, 브라운은 유로 가입의 전제조건을 이야기했다. 그는 신중하고 논리적이다. 브라운이 내미는 두터운 보고서를 영국 국민은 신뢰한다. 그는 16세에 스코틀랜드의 명문 에든버러대에 들어간 수재다. 20대 초반에 경제학 박사가 됐으며, 한때는 모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두뇌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다. 그러나 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대목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다. 블레어가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정치인이라면, 브라운은 그의 정책이 이해받기를 원한다. 노동당 각료 사무실 가운데 가장 일찍 불이 켜지는 곳도, 가장 늦게 불이 꺼지는 곳도 브라운의 사무실이다. 덩달아 일에 시달린 그의 스태프들의 소망대로 브라운은 2000년 봄 늦장가를 갔지만, 여전히 브라운 사무실의 불은 가장 늦게 꺼진다.

브라운은 언제부턴가 ‘철의 재상 (iron chancellor)’이라 불리고 있다. 대처에게 따라다녔던 ‘철의 여인(iron lady)’이라는 별명이 떠오른다. 국민에게 당장 박수 받기 힘든 정책을 꿋꿋하게 밀어붙이는 점에 있어서 브라운은 대처를 닮았다. 그러나 브라운에게는 대처에게 없는 블레어라는 든든한 방패막이 있다. 브라운의 ‘강성 선택’은 블레어의 화려한 수사학을 통해 영국 국민에게 부드럽게 다가간다. 반면 블레어의 총론은 브라운의 각론을 통해 구체적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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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 프리랜서·영국 워윅대 철학박사과정수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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