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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일본 정치인 친미 일변도·우경화 우려할 만한 수준”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일본 정치인 친미 일변도·우경화 우려할 만한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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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관계, 한국은 할 일 했지만 일본은 안 했다
  • ●청산하지 못한 ‘부(負)’의 유산
  • ●총리 야스쿠니 참배 이해할 수 없어
  • ●고이즈미 총리, 우경화에 둔감해 불안
  • ●일본은 대미관계에만 관심
  • ●헌법, 개정하지 않아도 불편할 것 없다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일본 정치인 친미 일변도·우경화 우려할 만한 수준”
2003년 11월19일. 일본의 하원인 중의원은 36년간 의사당에서 잔뼈가 굵은 13선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67) 의원을 새 의장으로 뽑았다. 재적의원 480명 중 477명이 그에게 표를 던졌으니 사실상 만장일치였다. 그는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정치노선이 전혀 다른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에게서 초당파적 지지를 얻었다. 의회주의 국가에서 입법부의 수장으로 선출된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대단한 성취이자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노 의장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가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된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고노 의장은 10년 전 원내 제1당인 자민당 총재로서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 등 3당 연합정권의 부총리 겸 외무상을 지냈고, 일본 정치를 주도해온 보수진영에서 비둘기파, 평화주의파, 진보적 보수파를 이끌어온 지도자다. 따라서 좌파(일본에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공산당, 사회민주당 등은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거의 괴멸됐지만)를 포함한 초당적 호응을 받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기적’이라는 것은 그의 건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02년 봄, 그는 간경변증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의 담당의사는 이렇게 선언했다.

“C형 간염, 간경변, 문맥압항진증(門脈壓亢進症)입니다. 이제 내과 치료로는 치병이 불가능합니다. 내과 치료를 계속하면 간부전이나 문맥압항진증에 동반되는 소화관 출혈로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할 위험이 높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간 이식이 유일한 치료법입니다.”

‘30년 환자’의 기적



고노 의장의 정치경력과 간장질환은 거의 궤를 같이한다. 그가 국회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30세인 1967년이고, 간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36세인 1973년 여름이었다. 그는 워낙 튼튼한 체질이라 맹장수술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진 것말고는 아파 누워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간장은 ‘침묵의 장기’라고 하지 않는가. 다소 이상이 있어도 뚜렷한 자각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간질환의 특징이다. 인근 소아과 의사가 아이들을 돌보러 왕진 왔을 때 우연히 진찰을 받아보고 간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매일 정기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일렀다.

하지만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는 의원생활에 새삼 몸을 살필 겨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혈기왕성한 기질인데다 부패정치 척결에 앞장선 신진 개혁의 기수였다. 한가로이 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1976년 일본 정계를 뒤흔든 록히드 부정사건이 터지자 그는 마침내 큰일을 내고 만다. 자민당 요인들이 미국 록히드사에게서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이 미 의회에서 폭로된 이 사건으로 다나카 전 총리 등이 구속되고 미키 내각이 붕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 진상 규명에 미온적인 자민당 지도부에 항의하면서 탈당을 결행한 것이 고노 의원 중심의 소장파 ‘신자유클럽’이다. 정치적으로 금성탕지(金城湯池)나 다름없는 자민당을 떠난다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의 모험에 동참한 의원은 다섯 명에 불과했다.

당시는 간기능에 이상이 생긴 지 3년이 지난 때로 이미 황달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단계였다. 2개월 정도는 입원가료해야 된다는 의사의 권유에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해 6월 의원 6명으로 신당 신자유클럽을 결성, 12월 총선거를 향해 뛰고 있던 고노 의원은 “내가 당의 얼굴인데 몇 달씩 입원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고집을 피웠다.

무모하게만 보이던 그의 ‘정치도박’은 국민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신자유클럽은 12월 총선에서 17석을 얻어 국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진보적 보수세력인 신자유클럽은 공명당, 민주사회당 등 군소정파와 제휴하면서 부침을 거듭하다 10년 후 자민당에 복귀한다. 보수개혁이라는 원대한 뜻은 결국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C형 간염은 지방간으로 발전했고, 의사들은 머지 않아 간경변으로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전문의의 감시하에 네오미노파겐C 주사를 맞아가면서도 정치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정치는 아편 같다는 말이 그에게 꼭 들어맞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9년엔 그의 아내가 자궁암에 걸렸고 6년 후 세상을 떠나는 가혹한 시련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병마와 싸우면서도 고노 씨는 정치적으로는 꾸준히 전진했다. 1985년 나카소네 내각에 들어가 과학기술청 장관을 맡았고, 1992년에는 미야자와 내각에서 관방장관에 올랐다. 일본에서 관방장관은 총리 다음가는 자리로 내각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관방장관은 내각을 대신해서 하루 세 차례 이상 기자들을 만난다. 오전과 오후에 기자회견이 있고, 밤에는 간담회 형식으로 기자들을 상대한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도록 기자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니 정신없이 바쁜 요직이다. 그런데도 만성 C형 간염 환자인 그는 그 일을 거뜬히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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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상 언론인·경원대 석좌교수 정리·이홍천/일본 게이오대 정책미디어대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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