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河野洋平<br>●1937년 가나가와(神奈川)현 헤이쓰카 출생 ●와세다대 정경학부 경제학과 졸업 ●1967년 중의원 당선 이래 13선, 자민당 총재 ●과기청 장관, 관방장관, 부총리 겸 외무장관 ●중의원 의장(2003년 11월∼ ) ●저서 : ‘자민당개조안’ ‘박수는 없다’ ‘결단’ 등

朴 權 相<br>●1929년 전북 부안 출생 ●서울대 영문학과·미국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논설위원·편집국장·영국특파원·논설주간·고문 ●시사저널 편집인 겸 주필, KBS 사장 ●경원대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 일본 세이케이대 객원연구원 ●저서 : ‘자유언론의 명제’ ‘영국을 생각한다’ ‘미국을 생각한다’ 등
사상 최강의 야당 앞에 좌파와 우파를 망라한 오합지졸 연합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턱이 없었다. 1년 남짓 혼란을 겪은 끝에 사회당이 떨어져 나가면서 연립정권이 무너지자,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제1당 자민당과 제2당 사회당이 연립하고 거기에 군소 중간파인 사키가케가 참여하는 대연정(大聯政)이다. 묘한 일이었다. 더욱 묘한 것은, 총리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위원장이 맡고 부총리 겸 외무상은 고노 자민당 총재가 맡은 것. 총리직만 내줬을 뿐 각료의 과반수를 차지함으로써 자민당은 사실상 정권을 탈환한 셈이다.
고노 씨는 병세가 호전된 것도 아닌데 당총재, 부총리, 그리고 외무상이라는 격무를 2년 가까히 해냈다. 더구나 당시 70세가 넘은 고령의 무라야마 총리는 각료직을 맡아본 적이 없는 인물. 고노 부총리로선 ‘아마추어 총리’를 모시게 된 것이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한반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1994년 7월, 그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 총리를 대신해 참석해야 했다. 그와 그의 아들 고노 타로(河野太郞·41) 의원은 함께 펴낸 ‘결단’이라는 책에서 당시를 “불과 반 달 동안에 7~8개국을 순방하고 갖가지 국제회의에 출석하는 과밀한 스케줄이 당연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995년 7월13일 아내의 죽음이었다. 자궁암 제거에 성공해 잠시나마 희망이 보였기에 그해 3월 헝가리 공식 방문에 동행하기로 했는데, 출발 직전 암이 재발해 부부가 동시에 입원 치료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래 살아야 1년”
그렇다고 정치활동을 멈출 수도 없는 처지였다. 뜨거운 7월, 당총재인 그는 참의원 선거유세로 전국을 누비고 있었다. 13일 시코쿠섬의 다카시마 거리에서 연설하던 중 비서에게서 메모지를 건네받았다. ‘사모님께서 숨을 거두셨습니다’라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연설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의 순회 가두연설 시간표가 미리 알려져 유권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정을 마친 뒤에야 마지막 비행기로 도쿄의 병원으로 돌아가 아내 다카코의 싸늘한 시신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규슈의 구마모토로 다시 날아갔다. 그는 세 자녀 앞에서 “구마모토에서 유세가 있다.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밤을 새울 수 없다. 장례 때까지는 돌아오마” 하고 약속했고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다들 “알았습니다”라는 반응이었다. 선거가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이 정도로 가혹한 것일까. 그는 ‘다카코도 정치가의 아내다. 선거가 전쟁임을 잘 알 것이고, 이렇듯 황망하게 헤어지는 것도 용서해줄 것이다’고 믿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자민·사회당 연정은 다음해 정월까지 계속됐으나, 그해 9월의 자민당 총재선거 출마를 포기했다. 간염은 악화일로였고 아내를 잃은 충격도 컸다. 일본 속담대로 ‘활 떨어지고 칼 부러진 격’이었다. 그는 이때 총재직을 그만둠으로써 자민당 총재로서는 유일하게 총리가 되지 못하는 기록을 남겼다.
요직을 떠난 후 그는 미국으로 가서 간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간경변 일보 직전이라는 놀라운 검사결과가 나왔다. 간암으로 악화될 수도 있고 정맥에 혹덩어리가 생겨 파열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최후의 방법으로 인터페론을 투여했다. 그의 나이 예순이었다. 그의 부친 고노 이치로(河野一郞)씨도 30년 전 총리에 오르기 직전 정맥류 파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고노 씨는 그 후 아버지의 선거구를 이어받아 내리 30년간 정계를 누볐으나 공교롭게 아버지와 똑같은 말로를 걷게 되었다.
치료 후 그는 1999년 오부치 내각에 다시 외무상으로 입각한다. 총리를 지낸 미야자와 기이치가 대장상으로, 자민당 총재 출신의 그가 외무상으로 들어가 ‘거물내각’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그에게 재입각은 자살행위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2001년 봄까지 2년 가까이 업무를 수행했다.
2002년 2월, 그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는다. 우려하던 대로 식도 정맥에 혹이 생겼고 정신이 갑자기 몽롱해지는 간성뇌증도 찾아왔다. 의사는 길어야 1년 남짓 살 수 있다고 했다. 간이식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이때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난다. 1996년부터 중의원으로 뛰고 있는 장남 타로가 자신의 간 일부를 아버지에 이식하겠다고 나섰고 나머지 아들과 딸도 서로 간 이식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자식들에게 “너희 마음은 고맙지만 인간에게는 수명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간을 못 쓰게 되어 죽는다면 그것으로 내 수명은 다한 것이다. 나는 건강한 자식의 배를 가르면서까지 목숨을 연장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