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후쿠이현 오바마시에 있는 제6잠수정 모형.
그 바람에 절친한 친구이자 국수주의자이던 한 문예비평가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당했다. 이 문예비평가는 “집이 소중하다, 아내가 소중하다, 나라는 망해도 개의치 않는다, 장사꾼은 싸울 의무도 없다는 듯이 떠드는 것은 너무나 간덩이가 부은 소리다”고 몰아세웠다.
아키코는 “시는 진정한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라면서 혹평을 일축했다. 그런 그의 반전사상도 시절이 바뀌면서 슬금슬금 변하여 전쟁 미화 쪽으로 기울어졌다.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언론 탄압도 극심해졌던 탓이리라. 급기야 그는 해군대위로 출전하는 넷째아들을 위해 ‘수군(水軍)의 대위가 되어 / 우리 넷째 전선으로 떠나는구나 / 용감하게 싸우렴’이라고 격려하는 작품을 쓰기에 이르렀다.
그야 어쨌든 죽음에 이르도록 주어진 임무를 다한 잠수정 승무원들의 사연은 계속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때까지 전사자의 유족에 대한 보상이 없었건만 메이지 천황은 희생자 유족들에게 위로금을 보냈다. 사쿠마 정장이 유언으로 남긴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또한 ‘아사히신문’과 해군성이 국민을 대상으로 공동 모금운동을 벌여 5만6000엔을 모았다. 요즘 가치로 따지면 억대에 해당하는 액수인 모양이다.
들뜬 분위기 속에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는 ‘사쿠마 정장 송가(頌歌)’도 나돌았다. ‘꽃은 져도 향기를 남기고 /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우리의 장한 사쿠마 정장은 / 일본 남자의 귀감이 되리라’는 제1연에서 시작해 ‘정장이 태어난 곳은 후쿠이현(福井懸) / 이 해군대위의 이름은 쓰토무 / 천황의 명으로 계급이 추서되니 / 죽음으로 꽃핀 영예로다’며 제10연까지 이어지는 서사시의 형태를 띠었다.
문예와 히로익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압권은 당대 최고의 문인, 아니 오늘날에도 일본 최고의 문인으로 존경받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제시했다. 그는 1910년 7월19일자 ‘아사히신문’ 문화면에 ‘문예와 히로익’이라는 제목 아래 충동적이면서도 아주 도발적인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나쓰메 전집’ 제16권에도 수록)
자연주의라는 말과 히로익(heroic, 영웅적)이라는 문자는 센다이히라(센다이 지방 특산 견직물)로 만든 하카마(전통 일본 옷 하의)와 도잔(외국에서 수입된 무명 직물)으로 만든 앞치마처럼 동떨어져 있다. 따라서 자연주의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히로익을 그리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형용이 붙는 행위가 20세기에는 있을 리 없다고 단정해왔다. 당연한 일이리라.
(중략)
나는 최근 잠항 중에 죽은 사쿠마 정장의 유서를 읽고 이 히로익이라는 문자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던 군인에 의해, 기계적인 사회 가운데에서 단숨에 활활 타오른 것을 기뻐하게 된다. 자연파의 여러 군자(君子)에게 이 문자가 오늘의 일본에서 여전히 참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사실로서 증명해준 데 대해 치하하고자 한다. 머릿속으로 히로익을 그리기가 께름칙하고 두려웠던 그들에게, 마음껏 이 방면에 손을 댈 수 있다는 보증과 안심을 주었다는 사실을 경하하는 바이다.
예전에 영국 잠수정이 이와 비슷한 불행을 당했을 때, 승무원이 죽음을 면하려는 일념에서 앞 다투어 한 곳에 몰려 물빛이 스며드는 창 아래 겹겹이 쌓인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본능이 책임감보다 얼마나 강한지를 증명하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본능의 권위만을 설파하려는 자연파 소설가들은 여기서 멋진 이야깃거리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해서 어느 수완가가 이 하나의 사실에서 걸출한 문학을 빚어 올릴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