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한국의 ‘능력’이다
앞서 설명했듯 이명박 정부는 초창기부터 한미동맹 복원 및 강화를 공공연히 내걸었다. 중국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기조는 과거 김영삼 정부가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천명하던 시기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물론 그 방향성은 정반대지만, 한국이 어떤 식으로든 지역 내 중국의 이해관계에 변화를 미칠 만한 파장을 던진 것은 분명했다. 중국은 이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고, (후 주석이 사석에서 한 것으로 알려진) “5년간 한국과 거래를 하지 않는다고 중국에 손해날 일이 있나”라는 발언으로 이어졌다.
겉보기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쓰촨(四川) 지진 현장을 방문하는 ‘아름다운’ 그림이 이어졌으나 실제는 이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흔히 외교는 쇼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시의성과 적절성, 때로는 매우 속 깊은 진정성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진정한 대화 파트너로 대접받기 어려워진 난관에 봉착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중국의 대북정책은 상대적으로 힘을 얻었다. 특히 북미관계가 개선되는 조짐은 중국으로서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고든 플레이크 맨스필드재단 사무총장이 말하듯 미국은 “미중관계의 번영이 한미관계에도 좋고, 한미관계가 좋아야 미중관계도 좋다”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이 ‘때깔 좋은’ 말이 언제나 진리는 아니다. 특정 국가 사이의 관계가 주부(主副) 상태에 놓이게 되면 하위에 있는 국가는 스스로에게 좋은 결과를 주도적으로 결정하기가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외교에서 자주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이 대중, 대미관계를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관점에서 처리할 역량이 있는지는 별개 문제다. 오히려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복잡한 다자 틀 속에서 북미관계나 북일관계 같은 개별적 관계망을 엮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이를 한국과 비교해 판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심각한 것은 한국의 정책이 가까운 시일 안에 변화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한미관계의 경우 전략동맹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더욱 큰 재정적·군사적 책임을 한국에 부과하고 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한미동맹은 미일동맹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으며, 한일관계가 나빠지면 한미동맹도 우려스러워진다”는 식이다. 또한 ‘경제 살리기’라는 주제에 다걸기를 하면서 외교보다 경제가 우선이라는 논리가 서울에서 대두된 것도 예사롭지 않다. 국가의 격(格)이 꼭 경제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이 어떤 이유에서든 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그래서 타당성을 갖는다.
한국, 중국 외교의 변방으로 전락하나
중국 공산당 내의 정치분석가들 사이에서 최근 떠돈 이야기 가운데 한 토막이다. “한국이 앞으로 5년 내내 저런 기조를 유지한다면, (중국 내에서는) ‘한국을 고려한 정책’이란 말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겠다.” 바꾸어 말해 한국은 중국 외교의 변방에 놓이게 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중국이 일본과의 영토·역사교과서 문제를 나름대로 풀어나가는 동안 한국은 일본과 충돌하고 있다. 계속돼온 한·미·일 ‘동맹’ 강조와는 양상이 다르다.
사실 이명박 정부의 외교기조는 지극히 단순하다. 한·미·일 공조체제를 살리고, 한미동맹을 견실하게 만들어 그 틀 안에서 미일동맹을 본다. 그러나 중국은 순서상 미일동맹의 아래에 한미동맹이 있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강하다. 따지고 보면 한미 양국이 동맹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파기하지 않는 한 이론적으로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는 병립이 불가능하다. 이는 노무현 정부가 꺼내 들었던 동북아 균형자론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긴장을 야기시켰던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7월 말부터 중국 수뇌부는 사회과학원 조선반도연구중심 등 한반도를 지켜봐온 많은 연구부서로부터 ‘올림픽 이후 한반도 정세판단과 정책방향’에 관한 다양한 보고서를 접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비록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개략적인 방향은 조금씩 나왔다. 중국의 신(新) 안보관에 따르면, 한반도 정세에서 ‘한국 변수’는 적(敵)의 범주에 가깝게 변해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대일, 대미관계를 강화하고, 대북관계에서도 더 가까운 친선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역시 이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중국 정부는 한국 변수를 특별히 주목하기보다는 ‘적절하게 무시하는’ 전략을 채택할 공산이 높아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외교역량 수준이 이미 선명하게 판가름 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5월27일 이명박 대통령의 중국 방문 당일 터져 나온 외교적 결례는 새삼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 일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중국의 대(對)한반도 정책 선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친강(秦剛) 외교부 대변인은 외신 브리핑을 통해 “한미군사동맹은 역사적인 산물이다. 시대가 변하고 동북아 각국 상황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냉전 시기의 이른바 군사동맹으로는 역내(域內)에 닥친 안보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다 신정승 주중대사의 신임장이 대통령 방중 당일에 제정된 일, 중국이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 정책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는 사실 등을 묶어 일부 신문은 ‘(중국의) 외교적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중국은 한술 더 떠 문제의 발언이 중국 정부의 공식 의견이라고 재차 밝힌 바 있다. 이 발언에서 주목할 부분은 중국이 “동북아 각국 상황이 바뀌었다”고 본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 또한 그에 맞추어 방향을 바꿔갈 것임을 예고한다. 그 전조(前兆)가 앞서 살펴본 중일관계의 개선인 것이다.
한국 정부의 ‘낡은’ 동북아 인식은 국내외에서 한결같이 비판받고 있다. 설화(舌禍)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대북정책에 있어 이명박 대통령은 ‘동정과 시혜 차원에서만 사고하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애초의 비판에다 ‘생각 없이 돌출발언을 하는’ ‘20년 전 냉전식 사고의 표출에 익숙한’ 대통령이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문제는 ‘무능외교’라는 식의 공격이 야당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 대통령의 행보와 발언은 북한 측 고위급 인사들이나 외교당국에도 실시간으로 전파되고, 이명박 정부의 외교력과 방향에 대해 즉각 냉소적인 평가가 나온다. 이 대통령이 TV에 등장하면 북측 인사들이 채널을 돌린다거나, 담배를 집어들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는 세간의 이야기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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