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핵 보유 선언은 용인과 적극적 묵인을 가름하는 부대 요건이다. 인도는 1998년 핵실험 직후 핵 보유를 공식 천명해 용인의 근거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핵 보유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모호한 입장(NCND)을 취했다. 용인의 근거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정 요건들의 충족 정도에 따라 미국의 핵보유국 인정 형태도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은 인정 요건들을 모두 충족한 인도에 대해서는 용인, 명백한 핵 보유 선언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적극적 묵인, 핵 비확산 의지·노력 및 민주주의·법치주의 구현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파키스탄에 대해서는 소극적 묵인의 형태로 핵 보유를 인정하고 있다. 소극적 묵인은 한시적 인정, 즉 전략적 활용 가치 상실과 더불어 철회되는 경향도 보이고 있다. 198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후 미국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대한 압력과 제재를 재개했다는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아프가니스탄 대테러전쟁 종식 이후 미국이 파키스탄의 핵 보유에 대한 소극적 묵인을 철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은 플루토늄 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고 있고 2차례의 핵실험까지 단행한 만큼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북한도 국제사회로부터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미국의 인정이라는 험준한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미국의 관문 통과 여부는 결국 미국이 설정한 인정 요건의 충족 여부에 달려 있다.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은 미국의 인정 요건들 중 핵 보유 능력 입증과 명백한 핵 보유 선언밖에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지정학적 활용 가치 떨어지는 북한
북한은 뿌리 깊은 대미 적대정책을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현대 세계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3대 세습 독재체제, 무자비한 인권탄압, 빈번한 무력도발도 자행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눈을 속여가면서 핵·미사일을 확산시키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따라서 대미 우호협력정책, 민주주의·법치주의 구현, 핵 비확산 의지 및 노력이 인정될 만한 근거가 부재하다. 북한이 주장하는 자위권 차원의 핵 보유 정당성도 미국의 위협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북한은 세계 전략적 활용 가치라는 핵심(최소) 요건조차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세계전략과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해 북한의 전략적 활용 가치를 찾아본다면 중국의 세력팽창 견제를 위한 군사기지 차용이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과 인접한 한국, 일본과 견고한 동맹관계를 구축하고 있고, 이 두 나라에 대규모의 미군기지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은 한·일을 통해 동북아 지역에서 대중 견제에 필요한 전략적 활용 가치를 충분히 제공받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대중 견제를 위한 북한의 지정학적 활용 가치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은 미국과 대립하고 있는 중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고 중국의 세력권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다. 무엇보다 북한은 핵·미사일 확산을 일삼음으로써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를 세계 전략적 주요 목표로 설정한 미국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 정권 그 자체가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의 견제·타도 대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핵 보유 능력 입증과 핵 보유 선언 요건 충족은 오히려 미국의 북한 핵보유국 인정을 가로막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할 뿐이다. 요컨대, 북한은 미국의 인정 요건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요건만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파키스탄의 사례와 같은 소극적 묵인조차 기대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