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국회의장, 의원에게 양주 선물하며 법안 ‘로비’

  • 글: 박민혁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mhpark@donga.com

    입력2003-08-21 18: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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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장, 의원에게 양주 선물하며 법안 ‘로비’

    박관용 의장이 의사진행 발언권을 달라고 항의하는 민주당 의원을 제지하고 있다(2003.2.26).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 민의(民意)의 전당 국회. 과연 그 안에선 무슨 일들이 벌어질까. 수많은 법안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고쳐지고, 국무총리나 장관이 출석해 의원들의 추궁에 진땀을 흘리기도 한다. 여야 국회의원들은 서로 삿대질하며 고함을 지르다가 심지어 몸싸움까지 벌인다.

    하지만 정작 TV에 비쳐지는 의원들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못해 근엄하기까지 하다.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국회의 겉모습’이다. 법안 통과를 둘러싸고 의원들간에 벌어지는 신경전과 물밑작업, 국회의원들의 회의참석 태도 등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이면(裏面)인 ‘국회의 속’을 적나라하게 아는 것은 아마도 국회의 ‘안방 마님’인 국회의장일 것이다. 국회의 겉과 속을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의 눈을 통해 들여다봤다.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은 높은 단 위에 위치해 있다. 의장석에선 본회의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박의장은 의원들이 ‘갑론을박’할 때 이 의장석에 앉아서 뭘 할까.

    “의장석에 앉아 있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밑에 앉아 있는 의원들의 행동을 볼 때면 ‘나도 예전에 저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지지. 회의에 늦게 오거나 아예 빠지고, 상대당 의원이 뭐라고 하면 고함을 지르고…. 그 짓 하는 것 보면 정말 밉다.”

    2003년 2월26일 국회 본회의장에선 한나라당이 제출한 1차 대북비밀송금 특검법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당 의원들이 번갈아 단상으로 나와 ‘의사진행발언’을 하며 시간 끌기에 나섰다.



    민주당 정대철(鄭大哲) 대표와 정균환(鄭均桓) 총무는 끊임없이 의사진행 발언자를 선정, 의장석에 그 명단을 제출했다. 하지만 막상 단상에 나와 의사진행 발언을 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얘기는 하나같이 “특검법 처리는 안 된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11명째 민주당 의원이 단상으로 나왔다. 박의장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의사진행 발언을 받지 않겠다. 발언 내용이 모두 같으니 취지는 모두 전달된 것 같다”며 의사진행 발언을 직권으로 막았다.

    민주당 의원들 자리 곳곳에선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의장이 독단적으로 국회를 운영하면 되느냐” “의장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제출해야겠다” 등등.

    “본회의 시작 전 의장실을 찾은 정균환 총무에게 토론은 얼마든지 허용하겠다고 약속을 했었지. 그런데 의장석에 앉아서 들어보니 똑같은 내용만 반복되는 거야. 정말 무의미하더라고. 이건 아니다 싶었지. 그래서 의사진행 발언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는데, 난리가 아니더라고.”

    박의장은 의장석에 앉아 가장 답답할 때가 정족수가 모자라 회의가 진행되지 못할 때라고 말했다.

    “정족수가 안 될 경우에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데 의원이 모자라는 거야. 한두 사람씩 들어와 겨우 정족수를 채울까 싶으면 앉아 있던 다른 의원이 또 나가는 거야. 화장실을 가는 건지. 그때는 정말 의장석에서 ‘김아무개 의원’이라고 이름을 불러 붙잡고 싶을 지경이지.”

    박의장은 회의가 지루하게 진행될 때는 의장석에 앉아 나름대로 터득한 ‘놀이’를 하기도 한다. 놀이라는 게 별건 아니다. 의원들의 신상명세가 적힌 국회수첩을 꺼내들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의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일일이 확인하기도 하고, 또 회의장에 몇 명이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숫자를 세어보기도 한다.

    “한번은 대정부 질문을 하는데 본회의장이 거의 텅 비어 있는 거야. 그래서 남아 있는 의원 수를 세어봤지. 22명이더라고. 그러다가 26명으로 늘었다가 다시 줄어들고…. 회의에 끝까지 남아 있던 의원들 이름을 공표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

    국회는 7월11일 북핵문제에 대한 긴급현안 질의를 위해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장관 등을 출석시킨 가운데 본회의를 열었다. 이날은 남북장관급회담이 예정되어 있어 정장관의 본회의 출석이 어려운 상황. 그러나 박의장의 요청으로 정장관은 어렵게 출석했다. 그러나 정작 회의 시간인 오전 10시가 한참 지나도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각각 대북비밀송금 특검법 처리문제와 민주당 정대철 대표의 굿모닝시티 자금수수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의원총회를 길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의장은 오전 10시3분경부터 의장석에 앉아 의원들이 들어오기를 무작정 기다렸다. 단 한마디도 없이, 별다른 거동 없이 무려 50여 분간 의장석을 지켰다. 일종의 ‘무언(無言)’의 시위였다.

    의장실 관계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의원들 없는 의사당에 의장이 저렇게 오래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여야가 국회를 경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오전 10시56분이 되어서야 회의는 시작됐고 마침내 박의장이 입을 열었다. 박의장은 “각 정당별로 어려운 사정이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국민은 (개회 약속시간인) 오전 10시가 되면 TV를 쳐다보고 기다린다. 본회의 개의시간을 맞춰달라”며 “남북장관급회담 때문에 나오기 어려운 통일부장관이 국회의 요구로 회담시간을 미루고 나왔다”고 말했다.

    박의장은 그날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의장석에 앉아 있는데 정말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지. 바쁜 장관을 나오라고 해놓고 회의를 늦게 시작했으니. 고건 총리와 정장관에게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는 못하고 회의 끝나고 나오면서 인사를 했다.”

    일반적으로 국회의장은 의장실에 마련된 구내 TV를 통해 본회의장에 의원들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뒤 본회의장으로 나가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관례. 그러나 박의장은 의원들의 ‘상습적인’ 지각 버릇을 고치기 위해 그날 일부러 일찍 나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 각 당은 의원총회를 꼭 본회의 시작 30분 전에 열어서 번번이 늦어. 지각을 반복할 때마다 특정 교섭단체가 국회를 좌지우지하는구나 생각이 들어 심하게 나무라야겠다고 생각도 하지만 의원들을 존중해서….”

    의원들은 회의에 지각하는 것을 늘 있는 일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치부 기자들은 각종 회의가 정시에 시작되는 경우를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다.

    “치고 박고 할텐데 한번 해보라”

    한나라당은 7월11일 대북송금과 관련된 모든 의혹을 수사대상으로 하는 ‘초강도 특검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한나라당이 이날 오전 의원총회에서 8일 법사위를 통과한 ‘비자금 150억원+α’ 특검법 수정안을 백지화시키고 이 같은 초강도 특검법을 제출한 데에는 8일 ‘북한의 고폭실험 확인’이라는 국정원의 보고 내용이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러나 표결처리에 앞서 민주당 의원들이 의장실을 점거하고 의결정족수도 부족해 이날 한나라당의 특검법 처리는 무산됐다. 의장실을 점거한 민주당 김옥두(金玉斗) 이협(李協) 의원 등 20여명은 박의장에게 “일방적인 의사진행은 안 된다”고 항의했다.

    이날 민주당 의원들의 의장실 점거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특히 이날 민주당 정균환 총무는 박의장에게 두 차례나 전화를 걸어 “단상 점거나 의장실 점거는 하지 않겠다”고 거듭 약속했던 터였다.

    한나라당에선 민주당의 의장실 점거를 예상했는지 박의장에게 본회의장을 떠나지 말고 의장석을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박의장은 정총무의 약속을 믿고 “그런 걱정 하지 말라”며 오히려 한나라당 의원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민주당으로서는 당시 의장 단상이나 공관을 점거하지 않는 한 한나라당의 초강도 특검법 처리를 막을 수 없었다.

    박의장은 이날 의장실 ‘감금’을 피할 수도 있었다. 이날 오후 3시 의장실에서 앉아 있던 박의장에게 급박한 보고가 들어왔다. 국회 정무수석이 “민주당이 의총에서 분위기가 격앙돼 의장실을 점거할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박의장은 예상보다 빨리 의장실을 나섰다. 그러나 이미 민주당 의원들이 문 앞까지 들이닥쳤고 김옥두 의원 등은 박의장에게 “의장실로 다시 들어가시죠”라고 언성을 높였다.

    박의장은 “내 발로 들어가면 들어갔지 물리적으로 들여보내려고 하면 나는 거꾸로 하는 사람이다. 의사봉을 쥘 수도 있다”고 맞섰다.

    결국 민주당 의원들은 수십분간의 의장실 점거 끝에 자진해서 물러났다.

    박의장의 감금은 지난해 8월31일에도 있었다. 이때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의장 공관에 갇혀버렸다. 김정길(金正吉) 당시 법무부 장관의 해임건의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당 의원 60여 명이 공관을 찾아 박의장의 출근을 막은 것이다. 결국 박의장이 사회를 보지 못해 해임건의안은 자동 폐기됐다.

    당시 한나라당 부총무들도 공관에 있었다. 의장의 출근을 돕기 위해서였다. 부총무들은 “같이 나갑시다”라면서 박의장을 부추겼다. 그러나 박의장의 단 한마디에 일순간 잠잠해져버렸다. 박의장은 부총무들에게 “내가 나갈 테니 옆에 서서 밀어라. 그러면 치고 박고 할텐데 한번 해보자. 그러나 분명히 뉴스에 나갈 것이고 언론에 당신들 얼굴이 나오면 차기 선거에서 떨어질 것이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당시 박의장은 몸싸움 없이 공관에 그대로 있었다.

    “과거 의장들은 이런 상황에서 뚫고 나가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엔 못 나갔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였지. 그러나 그런 모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장 공관이나 의장실 점거는 내 대에서 끝나야 한다. 과거의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박 의장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의원 152명 만나 ‘로비’

    국회는 1월22일 대정부질문 방식을 기존의 일괄질문, 일괄답변에서 ‘일문일답’방식으로 바꾸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6월20일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선 국회의 재정통제권과 행정부 견제감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국회의장 직속 예산정책처 신설을 골자로 한 ‘국회예산정책처법’이 통과됐다.

    이 두 법안이 통과되기까지는 박의장의 ‘눈물나는’ 대(對)국회의원 로비가 있었다. 국회운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은 박의장의 평소 소신. 이를 위해 박의장은 국회법 개정안을 내놓았지만 의원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심의를 미루고 있었다.

    박의장은 이 법안의 통과를 위해 밤낮으로 국회의원을 만나 설득작업을 폈다. 1명도 좋고 2명도 좋고 시간만 나면 의원들을 만나 식사를 대접하며 ‘로비’를 했다.

    “무심코 수첩을 보니 그동안 만난 의원이 무려 152명이나 되더군. 양당 총무들에게도 수십 번이나 부탁을 했는데 부탁할 때는 ‘좋다’고 해놓고선 돌아서면 ‘도루묵’인 거야.”

    박의장은 1차 심의 상임위인 운영위 소속 의원들에게는 ‘각별한’ 로비를 펼쳤다. 두 차례나 의장 공관으로 불러 잘 마시지도 못하는 ‘폭탄주’까지 곁들여 설득을 했다.

    ‘이 정도 했으면 됐겠지’ 싶어 박의장은 독일로 출장을 떠났다. 그러나 독일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박의장은 최구식(崔球植) 공보수석으로부터 “국회법 통과가 의원들의 무관심으로 어렵다”는 보고를 받았다. 박의장은 그 즉시 의원들에게 국회법 개정안의 필요성을 담은 e-메일을 보냈고 그것이 의원들의 ‘심금’을 울렸던지 마침내 국회법은 통과됐다.

    박의장은 국회예산정책처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한 의원에게 양주까지 ‘뇌물’로 바쳤다.

    “당시 운영위소위 위원장인 한나라당 임인배(林仁培) 의원이 이 법안에 대해 특히 반대를 했어. 할 수 없이 불러내 저녁을 사주고 양주 한 병을 뇌물로 줬지. 민주당 함승희(咸承熙) 의원도 이 법안을 반대해 따로 불러내 설득을 했는데 막상 심의에 들어간 함의원은 목소리를 높여가며 이 법안에 대해 반대를 하더군. 하는 수 없이 회의장에 들어가 함의원의 어깨를 ‘툭’ 쳤지. 그랬더니 조금 수그러지더라고. 너무 어렵게 법안이 통과됐어.”

    “내 집무실 의자를 가져가고 싶다”

    박의장은 의장 임기가 끝나면 정치를 접고 사회봉사활동을 할 계획이다. 정치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단 한 가지 국회를 떠나면서 가져가고 싶은 것이 있다. 자신이 앉았던 의장실 의자가 그것이다.

    “내가 앉은 의자 뒤에 ‘박관용 국회의장 임기 00에서 00까지’라는 문구를 적어 가져가고 싶다. 미국에 갔더니 국무회의 장소에 있는 의자에 각료의 이름과 임기가 적혀 있더군. 그 각료가 퇴임하면 의자를 준다는 거야. 의자가 몇 백년 가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사람이나 자식이 볼 때 아버지가 의장 하고 이것 하나 가지고 나왔구나 하는 표시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퇴임 후 그 의자에 앉으면 거기에 앉아서 고심했던 많은 일들이 여운으로 남을 것 같아.”

    박의장은 자신의 눈에 비친 국회의원들의 모습에 대해 할말이 많은 것 같아 보였다.

    “국회의원이라면 아침에 일어나 국가와 국민을 위해 뭘 할지를 한번쯤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의원이 많지 않은 것 같아 답답하다. 국회의원으로 출세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게 아닌지…. 지나친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의사당에서 의원들을 볼 때면 늘 이런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박의장의 속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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