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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국세청맨’ 이철성 박사의 개발시대 세무비화

“‘見金如石’ 넥타이 매고 전국 누비며 세무사찰, 털어도 털어도 먼지 안 나던 유한양행”

‘원조 국세청맨’ 이철성 박사의 개발시대 세무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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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 첫날 들은 말이 ‘빽’

그에게서 초창기 우리나라 공무원 사회의 일화를 듣다 보니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남 통영에서 나고 자라 부산대를 다니던 25세 청년 이철성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50년 전인 1956년, 제7회 행정고시 재정경제 부문에 합격한다. 출두 통지서를 받고 맨 처음 재무부에 가서 들은 말이 바로 ‘빽’이었다. 총무부 인사계장 송씨(그는 자신의 책에서 ‘실록’답게 당시 인물들의 실명을 모조리 밝혀놓았다)는 수습행정관들을 세워놓고 재무부에 관한 브리핑을 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여러분은 고등고시 합격자라는 똑같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누가 어느 과(課), 어느 국(局)에 배치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이곳에서 받은 연수성적과 소위 빽이라는 힘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순진한 것인지 솔직한 것인지 아니면 냉소적인 것인지 알 길 없지만, 공식적으로 빽의 중요성을 선포하는 공무원 사회라니 코미디 같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 1인당 국민소득(GNP)은 50달러.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는 문맹인이 인구의 80%였고 국가재정이나 국민경제는 전적으로 미국 원조에 의지하는 꼴이었다. 그는 첫 월급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산비탈 문간방에 점심 없는 하숙비가 될까말까 한 돈이었다.

“수습행정관이면 3급이니 고급공무원 반열에 들었고, 일반 직원인 서기나 주사보다 높은 간부직이었거든요. 당시 3급 공무원은 지방에서 군수나 경찰서장으로 근무했는데, 그 월급이 한 달 하숙비가 채 안 된다는 것은 자유당 정권이 공무원들에게 관권을 이용해 백성을 뜯어먹고 살라고 임명장을 줬다는 얘기밖에 안 되죠.”



하숙 대신 적선동(종로구)에 방을 구해 통영의 어머니가 보내준 식모를 데리고 밥을 해먹으며 광화문 교보문고 자리에 있던 재무부로 출근했다.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다. 어느 날 중앙청 앞을 지나다 꼭대기를 쳐다보니 그 건물의 녹슨 쇠다리 끝 지붕의 기둥 옆에 고시 동기 하나가 앉아 있었다.

약사 마누라를 구하라!

“중앙청 건물은 당시 전화(戰火)로 깨어져 괴물처럼 버려져 있었거든요. 그 꼭대기에 숨어 있던 친구는 나중에 문교부 차관을 지낸 장인숙 군이었어요.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고 왜 여기 올라와 있냐니까 ‘다들 밥 먹으러 나가는데 따라가려니 돈이 없고 혼자 자리에 앉아 있기는 멋쩍어서 매일 점심시간이면 이 꼭대기로 올라온다’는 거예요. 우린 그날 중앙청 꼭대기에서 광화문 쪽을 향해 오줌을 갈겼어요. ‘점심을 굶게 하고 주사, 촉탁, 임시직원까지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먹고 살게 만드는 자유당 놈들아, 우리 오줌 맛이나 실컷 봐라!’ 하면서 명색이 3급 공무원들이 말이죠.”

그 어린 공무원들의 기개가 분명 오늘 우리 삶을 만드는 한 부분이 됐을 것이다. 수습 시절의 오줌 덕분에 그들은 남의 것을 뺏어먹을 수가 없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줬다.

그가 찾은 자료에 따르면 1954년 10월, 3대 민의원 윤보선씨의 월급봉투에 기입된 지급액은 세비, 거마비, 수당 등을 합쳐서 총계 3만1600환. 거기서 세금, 경조금, 탄값을 제외한 실제 수령액은 당시 쌀 두 가마 값이 채 안 되는 돈이었다. 국회의원 윤보선의 월급이 그 정도였으니 일반 국민이야 말해 무엇하랴.

묻혀 있는 옛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는 오늘 우리 삶과의 비교에서 온다. 1958년 재무부 통계연표를 보면 1인당 평균소득은 8만3800환, 조세부담액은 7838환, 한 가정이 네 명이라고 치고 소득에서 세금을 빼면 가구당 소득은 30만4000환 정도, 그것을 12개월로 나누면 월 평균 2만5000환쯤이 된다.

월급만 받아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공무원, 그렇다고 빽도 없고 돈도 없고 남의 것을 뺏기도 싫었던 공무원, 그들이 사는 방법은 부자집에 장가들거나 그도 아니면 돈을 벌 수 있는 아내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부정해서는 안 되겠다는 자부심과 의기는 넘쳤어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고 싶으면 부정한 짓을 해서는 안 됐고요. 그러니 장가들 때 돈 버는 부인을 얻기는 해야겠는데, 당시 여성의 사회진출이 제한돼 있으니 직업이랄 게 뭐가 있나요. 은행원, 교사, 의사, 약사 정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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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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