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와 건강 문제 구설수
이런 가운데 마침내 1999년 12월31일 자정, 옐친의 전격적인 하야 성명이 발표됐다. 그는 자신의 실정(失政)으로 국민을 실망시킨 데에 대해 사과하고 새로운 21세기에는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해 러시아 발전을 이룰 것을 기원했다. 그리고 당시 총리로 재임하던 푸틴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고, 2000년 3월26일 대통령선거가 시행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로써 현대 러시아 정치사에 파란만장한 흔적을 남겼던 옐친의 공식적인 역정이 끝을 맺는다.
옐친은 퇴임 후 비교적 한가로운 생을 보내다 2007년 4월23일 심부전증으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은 그의 생전 공과(功過)에 관계없이 국장(國葬)으로 엄숙하게 진행됐다.
옐친이 세계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후 그를 줄곧 힘들게 한 것은 음주와 건강상의 문제에 따른 구설수였다. 옐친이 오랫동안 심장병을 앓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의 사후 네덜란드 의료진에 의해 모종의 신경질환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음주에 관련된 기행이 상당 부분 건강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술이 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옐친은 술을 즐겨 마셨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단순히 술을 즐긴 정도가 아니라 알코올 중독으로 불릴 정도로 탐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러시아의 국민주 보드카와 그에 따른 술 문화가 깔려 있다.
물론 옐친이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공식석상에서 보드카만을 마실 것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성장 과정과 오랜 음주 습성에는 보드카로 상징되는 러시아의 정서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옐친처럼 공공연히 음주 문제가 거론되는 지도자를 국민이 용인해준 것도 술에 관련된 러시아 특유의 풍토와 문화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 보드카는 과연 어떤 술일까?
이른바 무색, 무미, 무취 세 가지 특징으로 널리 알려진 보드카는 대표적 증류주 중 하나로, 그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러시아를 떠올리는 술이다. 러시아 특유의 혹독한 겨울과 광활한 대지에 펼쳐지는 설원은 강한 알코올 기운을 풍기는 투명한 보드카와 완벽한 앙상블을 이룬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보드카만큼 단순한 술도 드물다. 호밀, 보리, 밀, 옥수수 등 곡물이나 감자, 당밀(糖蜜) 등 다양한 원료를 발효시켜 에탄올을 얻은 뒤 이를 증류하기만 하면 보드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증류 자체도 풍부한 복합미를 얻을 수 있는 단식 증류법을 적용하지 않고 상업적인 대량 생산이 가능한 연속 증류법을 적용한다. 게다가 술의 특징상 고급 증류주를 만드는 데 핵심이 되는 나무통 숙성 과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색, 무미, 무취의 단순한 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어떤 재료를 쓰느냐와 증류 후 술의 여과 방법에 따라 보드카 품질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보드카의 궁극적인 맛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보드카는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든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면 어렵지 않게 생산할 수 있는 술이다.
무색, 무미, 무취의 단순한 술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소주도 희석식이라는 표현 그대로 물을 타서 알코올 도수가 낮다는 것뿐이지 보드카와 같은 종류의 술로 생각할 수 있다. 보드카도 결국 물과 에탄올(주정) 그리고 약간의 불순물과 조미료가 그 성분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보드카의 알코올 도수는 전통적으로는 38%이지만,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해 국제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대부분의 보드카는 40%(80 proof)로 출시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는 술에 보드카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알코올 도수가 적어도 37.5%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이 기준을 40%로 정하고 있다.
보드카는 생산 회사가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고 많은 국가에서 이를 음용하고 있지만 최대 소비국은 역시 동유럽과 발트 3국 등 이른바 보드카 벨트(Vodka Belt)에 위치하고 있다.
보드카는 오래전부터 칵테일의 바탕 술로 널리 사랑받았다. 좋은 칵테일이 되기 위해서는 바탕이 되는 술의 맛이 너무 강하거나 도드라져서는 안 된다. 다른 첨가 성분들의 맛을 제대로 살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논리로 일찍이 보드카에서 발달한 것이 가향 보드카라는 것이다.
가향 보드카(flavored Vodka)는 보드카에 각종 향을 내는 재료를 혼합해 만든 제품, 즉 바닐라 보드카, 오렌지 보드카 같은 것을 말한다. 보드카는 비록 스스로는 특별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 점이 오히려 어떤 재료와도 원만히 혼합될 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되고 있다. 가향 보드카 역사는 매우 오래돼 거의 보드카가 탄생할 무렵부터 시도되었다고 보고 있다. 가향 보드카 재료로는 각종 과일에서부터 약초, 심지어 고추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료가 이용되고 있다. 그냥 향을 보드카에 섞어주는 단순한 방법에서부터 담금술처럼 재료를 보드카 안에 넣고 그 성분을 오랫동안 추출해내는 방법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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