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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고비마다 정주영의 기지가 번뜩였다”

“협상 고비마다 정주영의 기지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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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방북 직후, 농장에 분배한 소가 급사하는 일이 몇 건 발생했다. 북한측이 해부를 한 결과 소의 위에서 비닐제품이 나왔다. 북한측은 이것을 현대측이 소를 사망시키기 위해 사전에 비닐제품을 먹였다고 판단, ‘남조선의 음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물론 그런 짓을 할 리 없는 현대측은 심하게 반발했고 교섭은 재차 중단됐다. 그 후 조사에 따르면 현대 농장은 매립지 위에 만든 초지로 땅 밑에 어망 등이 묻혀 있는 경우가 있고, 그것을 송아지가 먹은 것으로 파악됐다. 그 사실이 밝혀진 후, 쌍방의 대립은 겨우 해결됐다. 이와 같이 사소한 일이 심각한 문제로 발전해 교섭이 몇 번이나 중단된 것은, 북한 내부에 현대와의 교섭에 대한 뿌리 깊은 반발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 교섭은 현대측의 끈질긴 교섭 열의, ‘햇볕정책’을 표방하는 한국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강장관의 전향적인 대응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현대그룹의 방북은 난항 끝에 6월16일부터로 결정됐다. 나는 일본인이란 이유도 있고 해서, 판문점을 경유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먼저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으로 갔다. 베이징-평양 간에는 특별기가 준비돼 있었다. 북한측의 배려였다.

방북멤버는 정명예회장을 중심으로 명예회장의 형제 세 명, 두 명의 아들, 그룹에서 주요 지위에 있는 회장, 사장급, 의사, 명예회장 전속 사진기사였다. 평소 정명예회장의 웅변을 알고 있던 나에게 그날따라 정회장은 다른 사람으로 생각될 만큼 말이 없었다. 아랫사람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등 체력도 많이 쇠퇴해 있었다. 그렇지만 권위적인 태도는 여전했다.

권위적인 왕회장



예를 들어 평양에서 조식시간이 되면 모든 사람이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으로(물론 나도 넥타이를 매고 참석했다) 정명예회장을 기다렸다. 정회장은 10여분 늦게 들어 왔다. 명예회장이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 때까지는 아무도 수저를 들지 못한다. 중역들은 전원 다 빠른 속도로 먹었다. “진수성찬이니까, 좀 천천히 드시지요”라고 내가 권했더니 “명예회장이 수저를 놓으시면 더 먹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귀엣말로 이야기해 주었다.

명예회장은 냉면을 무척 좋아한다. 도착한 다음날 초대소에서 내놓은 냉면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날은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날은 고려호텔에서, 이런 식으로 수일 동안 점심 때마다 냉면을 먹어야 했다.

정명예회장은 1989년 첫 방북 때 수행했던 현대건설 부사장에게 “이 일은 자네가 책임지고 하게. 대신 사장으로 승격시켜줄 테니”라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 승진시켰다는 일화를 요시다 사장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 방북에서도 동행했던 사장과 부사장들은 그 후 한 단계씩 특진했다고 한다.

일행은 교섭 중간에 금강산을 방문해 부근의 정명예회장 생가를 방문했다. 원산까지는 비행기, 거기서부터 명예회장을 비롯한 주요 멤버는 김용순 비서가 탄 요트로, 나와 나머지 사람들은 자동차로 도중의 항구까지 가 거기에서 요트로 내려온 명예회장팀과 합류, 정명예회장의 생가로 향했다.

친족들과는 눈물의 재회였다.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끊어져 있는 남북한간 철도가 재개된다면 겨우 몇 시간 거리지만, 89년에 방문한 명예회장을 제외한 형제와 자식들은 남북분단 후 첫 방문이었다. 1시간 정도의 재회로는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다 풀지 못했는지, 명예회장은 예약했던 금강산 호텔을 취소하고 생가에서 이틀밤을 묵었다. 금강산 기슭의 숙박소는 생가에서 차로 40분 정도 거리였다.

이번 방북에서 나는 교섭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완전한 ‘손님’이었다. 내 할 일은 ‘역사의 증언자’라고 생각해 보려고도 했으나 어쩐지 무료했다. 30여년 간 기자를 해온 습성에 적어도 생활양태 등을 조사해보려 해도, 북한주민에게는 직접 물을 수가 없었다. 지도원이 “이번은 기자가 아니라 현대의 요청에 따라 중개인 자격으로 오셨으니까”라며 몇 번씩이나 다짐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정일 총비서 면담 확약

방문중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고 현대 수뇌부들의 표정은 밝았다. 말 없는 정명예회장이 조찬 자리에서 농담을 해 폭소하는 일도 있었다. 딱 한 번, 귀국 이틀 전 현대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정을 물으니까, 북한이 약속했던 김정일 총비서와의 회견을 “총비서는 최고인민회의선거 때문에 지방 연설중이어서 이번에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명예회장은 “그렇다면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몇 개월이라도 기다리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문제도 김용순 비서가 총비서와 연락한 다음, “9월에는 총비서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낼 테니, 그때 꼭 만납시다”라는 확약을 주어 해결됐다. 이 때문에 정명예회장은 귀국 전날 열린 김용순 비서 주최의 만찬에서 시종 기분이 좋았다.

나도 이 만찬에서 이별 인사를 나눌 때 김비서로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우리나라를 위해 노력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번은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다음번에는 천천히 말씀을 나눕시다”라는 인사를 들었다.

이제 정부간 채널도 정비되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보아 내 일은 끝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남북한 문제와 북·일 국교정상화교섭 등에 작으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싶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일본의 국익 때문이다.

한반도와 관련된 문제에서 일본에 가장 유익한 일은 무엇인가. 그건 한반도에서 만약의 사태(有事·전쟁)를 방지하는 것이다.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사일 한두 발은 일본에 날아올지 모른다. 1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밀려들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부담은 전후복구 차원에서 일본이 할 일이다. 전쟁은 아마도 군사·경제면에서 우위를 유지하고 있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한국이 승리하겠지만 인적·물적 피해는 막대할 것이다. 국토는 황폐하고 산업은 괴멸상태가 될 가능성도 있다.

지금 일본에 필요한 것은 냉정하게 판단해서 장기적인 시야에서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한국의 석학 이어령 이화여대교수는 “전전(戰前) 일본의 천황제를 가장 충실하게 답습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아닐까”라고 말했지만 나도 북한사회가 전쟁 전의 일본사회와 어떤 의미에서 흡사한 점이 적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일본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일본이 걸어온 ‘언젠가 왔던 길’을 걷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본은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심각하게 논의해야 할 시기다.

중개역할은 끝났지만 나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통일을 위해, 일본인으로서 미력이나마 계속해서 노력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신동아 200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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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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