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개혁파의 움직임에는 바로 이러한 변화를 내다본 사전 포석이 담겨 있다. 물론 이회창 총재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한나라당은 다르겠지만, 민주당 내부의 그러한 움직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리라 예상한다면, 전망이 그리 비관적인 것만도 아니다.
이와 관련, 정치권내 개혁파 1세대라 할 수 있는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 부총재는 최근 여야 개혁파의 행동을 역사적 흐름 속에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그는 “세계적인 냉전해체에 이어 남북간의 화해로, 그 동안 우리 정치를 억눌러온 분단이데올로기가 사라져가?있다. 이러한 상황에 개혁정치세력의 등장은 시대적 필연이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국내 정치질서까지 변화시키고 있다”며, “현재 개혁파의 움직임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차 정계개편에 단초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고 환경이 변한다 해도 개혁파 정치인들은 여러 가지 고민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커다란 장벽은 이들의 행동을 이단시하는 당내의 권위주의다. 2월9일에 있었던 민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나타난 득표 상황은 당의 중진들이 이들의 행보에 적지 않은 반감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차 투표에서 김덕규(金德圭) 의원을 지지했던, 보수성향인 중진들의 표가 결선투표에서 이상수 의원에게 몰렸고, 그 결과 소장파인 천정배 의원이 패배했다. 총무 경선을 통해 중진들은 그 동안 당 쇄신을 요구해 온 초·재선 소장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도 민주당에는 개혁성향의 의원이 많아 여건이 좋은 편. 13대 총선 이래 선거 때마다 재야 혹은 학생운동 출신 인사들이 수혈돼왔고, 이들은 현재 초선부터 3선 그룹까지 두텁게 민주당 내에 분포돼 있다.
그러나 민주당에는 김대중 총재라는 절대적인 지도자가 버티고 있다. 오랜 기간 1인 정당체제에 익숙한 풍토에서 김심(金心)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그런 여건에서 당 지도부의 의사와 무관하게 독자 행동을 하는 것은 김심(金心)에 대한 도전이며, 당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왔다.
한나라당은 사정이 더욱 어렵다. 구여권 출신 인사들이 당 지도부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여건에서 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과거 오랜 여당생활로 위계질서가 체질화된 당내 문화는 소장파 의원들의 독자적 목소리를 ‘튀는 행동’으로 단죄하는 경우가 많다.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의원들이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 개혁파의 독자적인 목소리는 당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요소라고 여기는 구성원이 적지 않다. 한나라당 개혁파 의원들은 “한나라당은 보수정당이다. 다른 소리 하려면 당을 떠나라”는 목소리가 등뒤에서 종종 들려온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왕따’를 각오한 항명
결국 ‘왕따’가 될 각오를 하고 항명을 하거나 독자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공천을 의식하고 당직도 기대하며, 당 지도부의 지원 속에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정치인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결단을 요구하는 문제다.
정범구(鄭範九), 김성호(金成鎬) 의원 등 민주당의 ‘왕따’ 그룹 가운데 일부는 지난 연말의 당직개편에서 주요 당직에 기용되는, ‘포용정책’의 혜택을 입었다. 소장파의 당 쇄신 요구를 포용하려는 당 지도부의 조치였던 셈이다. 반면 김원웅, 서상섭(徐相燮), 안영근(安泳根) 의원 등 한나라당 내의 ‘왕따’ 그룹은 변함없이 외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사정이 어렵다고 해서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다. 개혁파 의원들이 16대 총선에서 한결같이 정치개혁을 내걸고 당선된 이상, 그 약속을 이행할 책임도 이들 몫이다. 16대 국회 개원 이래 이들은 여론의 질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개혁파 의원들의 적극적인 행동에 대한 갈증은 흔히 386정치인들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6대 총선에서 이른바 386 후보들은 정치개혁의 기수로 대접받았고, 선거전에서 그에 따른 프리미엄을 누렸다. 거품이 있기는 했지만, 그만큼 많은 기대를 받았다는 얘기다.
16대 총선을 두 달 앞둔 지난해 2월, 민주당에 공천신청을 냈던 임삼진(林三鎭) 전 청와대 비서관은 당시 ‘젊은 피’들의 공천 줄대기 행태를 비판하며 자신의 공천신청을 철회하여 화제가 됐다. 시민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뛰어들려던 임씨는, “이른바 ‘젊은 피’로 영입된 사람들이 핵심실세의 비서들과 친해져 작은 공천 정보라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꼴은 보기 안타까웠다”며 “특히 일부 인사들이 공천을 위해 유력자의 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는 얘기를 듣고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16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주변에서는 ‘젊은 피’들의 공천 줄서기가 기성 정치인 뺨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최근 들어 정치권 주변에서 ‘386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과 야유의 소리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광주 5·18 기념식에 참가했던 386 정치인들이 현지의 한 룸살롱에서 여종업원을 끼고 술판을 벌인 일은 그들에 대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학생운동 출신인 허인회 위원장이 청와대에서 김대통령에게 엎드려 절하는 광경이 언론에 공개돼 논란을 빚기도 했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송영길 의원이 의원총회에서 당의 보호가 미흡하다고 질타하자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민주당 대표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김성호 의원이 지난해 통일외무위원회의 해외 국정감사 기간에 재미 동포 여성에게 금품을 주고 성관계를 맺은 사실이 알려져, 386정치인의 도덕적 위신이 땅에 떨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386정치인들 전체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을 계기로 386정치인들에게 쌓여 있던 실망감이 공격적으로 분출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인터넷에는 386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과 울분을 격하게 토로하는 글이 줄을 잇는다.
국회법 날치기, 선거비용 실사 발언 파문, 국회파행, 의원 빌려주기와 DJP 공조복원 등의 일이 생겨나도 이들의 침묵은 계속됐다. 오히려 그들의 선배인 40대 의원들이 ‘거사’에 나서고 이들은 그저 지켜보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당의 보수일변도 대북정책, 보안법 개정 반대 등에 대해 앞장서서 포문을 여는 것은 주로 김원웅, 서상섭, 안영근 의원 등 40대 이상의 의원들이고, 정작 386세대에 속하는 원희룡(元喜龍), 김영춘(金榮春), 남경필(南景弼) 의원 등은 좀처럼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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