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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대립 1년, 우익독주 55년

한국현대사의 좌우익 논쟁

좌우대립 1년, 우익독주 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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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은 없고 필화만 1976년 손세일씨가 펴낸 다섯 권짜리 ‘한국논쟁사’에는 소설 ‘자유부인’을 둘러싼 시비 등 수십 건의 논쟁이 실려 있지만, 좌우익 간의 이념논쟁에 가까운 것은 한 편도 없다. 그만큼 휴전 이후의 한국사회는 이념논쟁의 불모지대였다. 시인 김수영의 표현처럼 ‘애비’가 지배하는 “묻지마 다쳐”의 사회에서, ‘4단7정 논쟁’ ‘예송 논쟁’, ‘호락(湖洛) 논쟁’ 등 논쟁으로 시작해서 논쟁으로 끝난 조선시대의 사상사적인 전통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머나먼 꿈일 뿐이었다.

지역감정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념논쟁이란 있을 수 없었다.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객관적인 계급은 점차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 하에서 주관적인 계급의식의 발전은 극도로 제약되었다. 경상도의 노동자와 전라도의 노동자가 횡적인 연대를 하는 대신 지역으로 갈라지는 나라에서 건전한 이념논쟁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념 논의의 주체가 정당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에서 이념은 주된 요소가 아니었다. 한국의 정당은 이념과 그에 따른 정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역에 기반을 둔 특정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인물 본위의 집단이었다.

좌우익 간의 이념 논쟁이라면 마땅히 논쟁의 주체가 자신이 좌파 또는 우파임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이른바 이념논쟁의 한 가지 특징은 공격수는 상대방을 ‘친북’, ‘사회주의자’ 등으로 매도하고, 수비수는 펄쩍 뛰며 이를 부인하면서 자신은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8년 말 최장집 교수의 한국전쟁에 관한 논문에 ‘월간조선’이 시비를 건 사건이다.



이념논쟁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사회주의나 좌파 정당의 존재 가능성이 차단된 한국에는 서구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다. 1970년대 유신 체제 하에서 모습을 드러낸 재야가 바로 그것이다.

재야는 좌파였을까? 서구적인 이념을 기준으로 한다면 재야는 결코 좌파라 할 수 없다. 한국의 상황에서 재야는 좌파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지만, 좌파와는 체질적으로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천주교 사제나 기독교 목사, 불교 승려들이 재야 진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는 장준하,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김수영, 이영희 등 실천과 이론으로 한국의 재야와 진보진영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 재야 지도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로 가보면 장준하는 극우민족단체 민족청년단 간부, 함석헌은 신의주반공의거의 배후이자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사상가, 문익환은 미군 통역장교, 계훈제는 우익 반탁진영의 행동대장, 김수영은 의용군에 나갔다가 탈출하여 거제도에 수용된 뒤 남쪽을 택한 반공포로, 이영희는 국군 장교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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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ㆍ한국현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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