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재력에는 비례, 민의에는 반비례

비사·全國區 39년

재력에는 비례, 민의에는 반비례

3/7
6대 국회 국방위에서 있었던 일이다. 야당인 자유민주당의 김준연 의원이 박대통령을 비난하자 차의원은 눈을 부라리며 금방 주먹질이라도 할 듯이 달려갔다. 그는 무쇠 같은 주먹을 하늘로 쳐들고 완력시위를 했다. 29세의 초선이 막무가내로 나오니 5선의 70세 노인인 김의원은 어이가 없어 말문을 닫았다. 본회의장에서도 야당의원이 박대통령을 공격하면 같은 군 출신인 권모 의원 등과 함께 연단으로 달려가 주먹을 흔들며 소리를 쳤다. 차의원에게 혼쭐난 사람은 야당의원뿐이 아니었다. 공화당의 이효상 국회의장이나 장경순 부의장이 미지근한 태도라도 보이면 사무실로 쳐들어가 ‘혁명과업을 방해한다’며 주먹으로 책상을 쳐댔다. 정말 그는 박대통령의 ‘혁명수비대’ 같았다.”

차의원의 오랜 측근이었던 H씨도 “당한 사람은 이런 차의원을 눈엣가시로 보았겠지만 박대통령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부하였다. 박대통령은 이런 방식으로 국회를 장악했다”고 했다. 차실장의 국회의원 시절을 잘 아는 동료의원 L씨는 “차의원은 의정생활을 약 11년이나 했는데, 그야말로 무풍가도요 승승장구였다. 박대통령이란 절대적인 ‘빽’이 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6대 전국구로 국회에 들어왔던 차의원은 7대에 박대통령 지시로 경기도 광주·이천에서 출마해 해공 신익희 선생의 장남 신하균씨를 거의 3배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 여세를 몰아 1969년 11월엔 35세로 의정사상 최연소 상임위원장까지 됐다. 차지철은 사실상 국회 내 박대통령의 정치특사였으며, 최고 실세였다”면서 “사정이 이러했는데 전국구제도가 국회 전문성 제고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박대통령은 새로운 친정인맥을 발탁하고 키우는 데뿐만 아니라 사람을 버릴 때도 전국구제도를 활용했다. 정치권내 한 소식통의 설명.

“대표적인 것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다. 박정권 시절 정보부의 대공사건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67년 7월의 이른바 ‘동베를린거점 간첩단 사건’이다. 음악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씨와 교수·학생 등 104명이 구속된 1960년대 최대규모의 간첩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정권안보의 일환으로 김형욱 중정부장 주도하에 면밀히 추진돼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마침내 김형욱 정보체제의 강력한 가동하에 1969년 12월 3선개헌이 완료되고 박정희 권력이 착근했을 때, 박대통령은 자신의 권력 내부의 치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김형욱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박대통령은 김형욱을 버리는데 1971년 공화당 전국구라는 감투를 활용했다.

그러나 김형욱은 정신병에 가까울 정도로 불안을 느꼈다. 지은 죄가 많아 보복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는 결국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했고, 배신자의 길을 걷다 1979년 10월 파리에서 의문의 실종을 당하고 만다.”



이런 식의 권력형 ‘전국구 활용’ 폐단은 전두환·노태우 정권기에도 답습됐다. 6공화국 때 정호용 의원의 거세를 위해 노대통령이 정의원에게 전국구를 종용했던 것도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특히 5공화국 정권은 이른바 신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태동시킨 정권이었기 때문에 출발부터 비민주적이었다.

5공 정권은 ▲대통령선거에서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선거를 했고 ▲야당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다당제 전략을 썼으며 ▲제1당이 전국구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지역구선거를 1구 2인으로 하는 등 제도적 편법으로 국회를 장악했다. 5공은 군부엘리트가 국정을 주도했으며, 군사문화가 정치·행정문화를 지배했고 통치는 있으나 정치가 없는 체제였다.

12·12 주역들, 대거 전국구로

실제 10·26 이전부터 이미 권력의 핵심에 위치해 있던 ‘신군부’ 세력에 수많은 관료 학자 등 민간인이 가담했지만, 이들은 거의 ‘기능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실권은 50명에 이르는 현역 군인에 집중돼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그후 전국구 이름을 달고 정치현장에 등장, 전국구 본래의 취지를 다시 한 번 무색케 한다.

5·17 당시 최고 권력기구였던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멤버는 모두 14명. 이들 중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제외한 12인 가운데도 전국구에 기용된 인물은 상당수다. 가장 꾸준히 요직에 기용된 인물은 12·12의 주역인 유학성씨(당시 육군중장). 5공 출범과 함께 안기부장에 발탁된 유씨는 12대 민정당 전국구를 정치권 진입의 발판으로 삼았다가 13대 때는 지역구(경북 예천)로 진출했고 국방위원장까지 지냈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김종곤씨는 5공 때 주중대사를 지내다가 13대 민정당 전국구로 발탁됐고, 당시 해병중장이었던 김정호씨도 11대 민정당 전국구의원에 기용됐다. 국보위 상임위원을 지냈던 김인기씨(당시 공군소장)는 1987년 공군참모총장을 마지막으로 예편한 뒤 곧바로 13대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으며, 당시 해군준장이었던 정원민씨도 11대 민정당 전국구의원을 지낸 뒤 1988년까지 석탄공사사장으로 일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도 전국구를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은 같은 군인정치 기반 위에서 권력을 이어받았다. 따라서 두 대통령은 처음엔 권력기반유지의 이해를 같이하며, 전국구에 관한 한 인맥을 공존·활용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권력 안전판’으로서 전국구를 이용한 것은 박정희정권의 유정회 제도가 물론 정점을 이룬다. 이런 제도가 전두환씨의 5공 정권에서는 제1당에 전국구의 3분의 2를 나눠주고, 노태우씨의 6공 정권 13대 선거에서는 2분의 1 보장으로 가다가, 14대 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여당 프리미엄이라 불리는 ‘보장장치’가 제거돼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 그 내부운영에서는 여전히 구태를 물려받고 있음이 확연했다.

13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집권 민정당이 발표한 전국구후보 62명을 직능별로 분류해보면 ▲정계=윤길중 의원 등 25명(40.3%) ▲관계=강영훈 전 대사 등 6명(9.7%) ▲법조계=이병용 변호사 등 2명(3.2%) ▲학계=나창주 건국대 교수 등 3명(4.8%) ▲언론계=손주환 중앙일보 이사 등 2명(3.2%) ▲사회직능분야=김동인 노총 위원장 등 6명(9.7%) ▲군=이광노 전 수도군단장 등 3명(4.8%) ▲여성계=이윤자 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장 등 6명(9.7%) ▲공공직능분야=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등 5명(8.1%) 등 겉으로는 비교적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3/7
이병도 < 시사평론가 >
목록 닫기

재력에는 비례, 민의에는 반비례

댓글 창 닫기

2023/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