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을 그토록 중시하는 것의 문제는, 대통령보다는 오히려 여론 쪽에 있다. 그가 신뢰하는 ‘여론’이라는 것이, 온전히 기댈 만큼 견고한 절대선이나 절대불변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대통령 자신은 크게 변한 것이 없는데, 후보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를 향한 여론은 죽 끓듯 변했다. 상황에 따라, 국민들의 기분에 따라, 제3의 요소에 따라 변하는 것이 여론이다. 개인 의견(opinion)의 집합체인 여론(public opinion)은 자체적으로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메커니즘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그런 여론을 지혜의 샘으로 삼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여론에서 돌파구를 찾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의견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일찍이 J.S. 밀이 갈파했듯, 모든 의견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여론은 또 목소리 큰 사람은 계속 소리를 높이고 목소리 작은 사람은 계속 침묵한다는, 이른바 ‘침묵의 나선이론’으로 종종 설명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나의 의견과 다를 것이라는 ‘제3자 효과이론’도 있고, 다원적 무지 현상도 종종 나타난다. 정치는 여론을 존중해야 하지만, 여론에 종속될 필요는 없다.
재신임 요구 자체가 조건 내건 것
10월13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도덕적 마비증상을 고치지 않고는 미래가 없습니다. 기업의 장부가 압수될 때마다 비자금이 나오고, 비자금이 나오면 당연히 정치권으로 연결되는 이 낡은 사슬은 반드시 끊어내야 합니다. 돈을 받은 정치인이 정치탄압과 야당탄압이라는 핑계로 적당히 넘어가고, 또다시 비자금 사건이 터지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기필코 끊어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를 재신임하거나 불신임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그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질까? 대통령을 바꾸거나 재신임하는 일대 홍역을 치른 국가의 도덕적 기준이 높아질 것이라는 그의 논리는 다음 말로 이어진다.
“저는 저 자신이 먼저 몸을 던져야 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민의 재신임을 묻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기준이 바로 설 수 있다면 남은 임기 동안 국정운영을 통해서 이뤄낼 수 있는 개혁보다 더 큰 정치발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대통령직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재신임 요구에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재신임을 요구하며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재신임을 요구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몸을 던지는 것과, 재신임을 요구하는 것은 상반되는 개념이다. 몸을 던진다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신임을 요구하며, 거기에 조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재신임 받을 것이라는 오만
그러면서 그는 아직도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미래의 모양이 그 다음으로 이어진다. “재신임을 받는 동안 얼마간의 국민 불안과 국정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진통은 감수합시다. 저부터 국정의 중심을 잡아가겠습니다. 이를 계기로 정치인과 공직자, 기업인, 언론인 등 모든 사회 지도층에 대해 국민들이 당당하게 도덕적 요구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갑시다.”
여기서 ‘재신임을 받는 동안’이라는 말은, 재신임을 기정사실로 가정하는 오만함을 드러낸다. 몸을 내던지는 것에서, 재신임을 요구하더니, 이제는 당연히 그리 되리라는 가정하에 ‘~합시다’라는 청유형 어미로 말을 맺고 있다. 국민에게 자기를 심판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데, 그는 오히려 국민에게 어떤 각성이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수사학적으로 논리적인 모순과 비약, 겸손을 가장한 오만의 사례를 보여주는 노대통령의 말에 비해, 닉슨 대통령의 사임 연설문은 차라리 논리정연하고 겸손하다. 1974년 8월8일, 임기를 2년 반 남겨두고 워싱턴의 그의 집무실에서 발표한 사임 연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연설은 대통령이 된 후 서른일곱 번째 국민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중략)…워터게이트라는 길고 어려운 기간을 거치며, 저는 국민 여러분이 선출해준 임기를 마칠 수 있도록 모든 가능한 노력을 하도록 인내하는 것이 저의 임무라는 것을 느껴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며칠 제게 명백하게 다가온 현실은 그런 노력을 계속하기에는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중략)…하지만 그런 기반이 사라지면서, 저는 헌법이 목적하는 바가 달성되었고, 과정을 더 이상 지연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아픔이 있더라도 임기를 마치기를 바랐고, 저의 가족들도 한결같이 그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이익은 그런 개인적인 고려보다 언제나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의회와 그밖의 다른 지도자들과 토의를 거쳐, 저는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제가 앞으로 국익을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더 이상 의회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중략)… 따라서 저는 내일 정오를 기해 대통령직을 사임하려고 합니다. 포드 부통령이 그때 합법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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