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 상반된 성격의 두 사람, 고건 전 총리와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를 할 때는 국회가 여소야대였고, 나중엔 민주당이 분당되면서 집권당이 원내 제3당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고건은 현안 입법과제에 대해 야당과 협상해 한-칠레 FTA(자유무역협정), 주5일제 관련 근로기준법, DMB(디지털위성방송) 허용 방송법 개정, 신용불량자 개인신용관계법 등을 통과시켰다. 정치력이 없다면 야당과 협의해 쉽게 처리할 수 없었던 사안들이다.
고건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수용해 정책에 반영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총리, 서울시장, 장관, 지사 시절에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남의 말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그는 골치 아픈 민원에 대해서도 열심히 들어주면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합리적으로 정책을 결정한다.
서울시장 시절 고건은 민원심사위원회, 수질검사위원회, 시정개혁연구위원회 등 여러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시민단체 대표, 변호사, 학자, 주부, 이해당사자 등을 참여시켜 다양한 세력이 함께 문제의 해결책을 찾게 했다. 그들이 제시한 해결책을 가능한 존중했다.
예컨대 1989년 각계 인사를 참여시켜 ‘남산 제모습찾기 100인 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그렇다. 옛 수도방위사령부 자리에 남산한옥마을, 옛 남산외인아파트와 외인주택 자리에 남산야외식물원, 옛 안기부장 공관 자리에 서울문학의 집이 들어서게 된 것은 그가 추진한 ‘남산 제모습찾기’의 결과였다.
요체를 알고, 맥을 짚고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고건은 외부의 압력이나 상급자의 청탁보다 부하직원의 전문적 판단을 더 중시했다. 그는 매주 1회씩 정례적으로 관련 공무원이 참석하는 ‘정책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는 정책에 관심이 있는 공무원이라면 누구라도 참석했으며, 담당 주사도 의견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회의에서 얻은 결론은 서울시의 중심정책을 이뤘다고 한다.
그가 조직을 관리할 때 의식적으로 강조한 원칙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이다. 노력한 대가를 받도록 함으로써 일과 인사는 따라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인사관리의 기준은 청렴도와 성취도. 전남도지사로 있을 때 고건은 단 한 사람도 중앙에서 밀고 내려오지 않도록 했다. 지방에서 근무한 공무원에게 승진 또는 영전의 기회가 돌아가도록 했다. 고건을 이상적인 서울시장으로 보는 이유로도 청렴, 공명정대, 인사의 조정능력, 인화단결 등 인사와 관련된 내용이 가장 많았다.
고건은 지금까지 맡은 과업을 대부분 성공적으로 수행했기에 ‘행정의 달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어떤 조직이든 고건이 장(長)이 되면 잡음 없이 잘 굴러간다. 그를 상사로 모신 사람들은 “일에도 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조용하고 냉정하게 들여다보면서 요체만 건드려 파열음이 생기지 않게 한다”고 얘기한다. ‘행정도 예술’이라고 하는 고건의 얘기를 들어보자.
“예술에서는 작품을 통해 예술가와 감상자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행정에서는 정책과 사업을 통해서 행정가와 시민의 소통이 이뤄진다. 소통은 체감을 전제로 한다. 행정의 고객인 시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행정 서비스는 관료만을 위한 행정이다. 예술이 작품을 통해 감동을 주듯 행정도 행정서비스, 정책, 사업을 통해 시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무미건조, 우유부단
그래서 고건은 탁상행정을 싫어했다.현장을 확인하고 현실에 적합한 행정을 강조했다. 스스로 달동네와 읍, 면, 동을 찾아다니며 현지 주민과 대화를 나누었다. 부하들에게도 그러한 것을 요구했다. 고건은 서울시장 부임 이후 약 6개월 동안 서울에 있는 100여 개의 달동네 중 30여 곳을 방문해 주민과 직접 의견을 나누고 서민 생활행정의 방향을 기초생활 환경을 개선하는 것으로 정했다.
예컨대 상하수도, 소방시설, 탁아소, 공부방을 늘리는 것이었다. 달동네의 주택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도 남달랐다. 과거에는 달동네를 싹 밀어내고 고층 아파트를 짓는 방법을 택해 언제나 세입자의 주거문제가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고건은 달동네에 임대아파트를 지어 세입자를 현지에 수용하는 재개발 방식으로 변화를 모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