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이 9월9일 청와대에서 정몽준 한나당 대표최고위원과 조찬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 과정에서 지자체 등이 요청한 예산이 대폭 삭감되거나 항목이 아예 없어지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지자체가 각 부처에 올린 예산은 부처 입장에서도 많이 확보할수록 좋은 ‘다다익선’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그동안 시행돼오던 기획재정부(과거 기획예산처)의 ‘예산안 편성지침’을 한층 강화했기 때문에 부처 취합 단계에서 축소조정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에 마련된 2009년도 예산안 편성지침은 ‘경제 살리기’라는 이명박 정부의 재정운용 방향에 따라 짜였다. 당시 10대 재정운용 방향은 ①일자리 창출과 7% 성장 뒷받침 ②감세를 통한 시장 활력 제고 ③재정의 경기대응 기능 강화 ④미래 대비 투자 강화 ⑤창의·실용 중심의 인재육성 ⑥지속가능한 맞춤형 복지시스템 구축 ⑦절약과 재정제도 개선을 통한 효율화 추진 ⑧공기업 민영화와 국유재산 활용가치 제고 ⑨재정운용의 자구노력과 책임성 강화 ⑩국가채무 관리였다.
올해 4월에 마련돼 각 부처에 시달된 2010년도 예산안 편성지침은 ‘우리 경제의 정상궤도 진입과 위기 이후 기회를 선점하기 위한 지원을 적극 뒷받침하고, 경제위기 과정에서 악화된 재정건전성을 안정적인 수준으로 관리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또 재원배분의 기본방향은 지역발전대책·녹색성장·신성장동력 등 미래 성장동력 확충을 위한 재정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R&D 확대·서비스산업 선진화 등을 통해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뒷받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아울러 세출 구조조정을 본격 추진해 모든 재정사업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국정과제 위주로 투자우선순위를 재조정키로 했으며, 이에 따라 4대강 살리기와 30대 선도 프로젝트 등의 국책과제에 대한 투자소요는 차질 없이 지원되도록 했다.
경제관료 출신 의원의 후광효과
기획재정부는 각 부처가 이런 지침에 따라 올린 예산에 대해 조정 작업에 들어갔고, 이 단계에서도 지자체와 의원들의 전방위 로비가 펼쳐졌다. 모든 시도가 해당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과 여려 차례 연석회의를 갖고 반드시 확보해야 할 예산들을 꼽아 의원들에게 할당(?)했다.
이 경우 각 지방의 정치지형에 따라 시도지사가 당정협의를 갖는 파트너 정당이 다르다. 영남권은 한나라당, 호남권은 민주당, 충청권은 자유선진당과 각각 당정 협의를 벌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지역의 소수 정당 소속이나 무소속 의원들이 협조요청을 하지 않는 시도지사와 갈등을 빚는 사례도 없지 않다.
기획재정부의 정부안 편성과정에서 힘을 발휘하는 의원은 역시 경제관료 출신이다. 정부 경제부처 근무시절 자신의 밑에서 과장이나 사무관을 지낸 공무원이 핵심부서의 국장급으로 있는 경우 알게 모르게 해당 지역의 예산에 신경을 쓰게 된다. 특히 옛 경제기획원→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에서 잔뼈가 굵은 일부 중진의원들의 경우 정부의 예산편성 때마다 의원실로 찾아오는 지방공무원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물론 지방자치단체장과 지자체 예산담당자들도 독자적으로 뛴다. 주로 출향(出鄕) 공무원들의 명단을 파악해 수시로 찾아가 지원을 요청한다. ‘역량’ 있는 지자체장은 국회의원들을 제치고 직접 장·차관을 만나 지역현안이 정부안에 반영되도록 담판을 짓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예산반영에 성공한 뒤 같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단체장이 서로 공을 차지하기 위해 얼굴을 붉히는 일도 다반사다. 한 가지 항목의 예산을 놓고 국회의원이 의정보고서에 ‘업적’으로 올리고, 단체장도 이에 질세라 시·도정 홍보에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국회의원과 단체장의 사이가 극도로 틀어진 지역에서는 서로 상대방의 업적으로 평가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에 대해서는 아예 손을 놓거나 오히려 줄이 닿는 정부 관료에게 반대논리를 펴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방의 공무원들이 중앙부처 공무원들을 찾아갈 때는 지역별로 정권에 따라 ‘대우’가 다르다. 영남권의 한 예산담당 공무원은 “과거 민주당 정권 시절에는 친분이 있는 중앙부처 공무원에게도 지역사정을 설명할 기회를 갖기조차 어려웠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로는 중앙부처 출입이 한결 수월해졌다”고 귀띔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9월9일 청와대에서 정몽준 한나당 대표최고위원과 조찬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부안이 마련되지만 이때까지는 그야말로 정부 편성안이다. 정부안이 국가 예산으로 최종 확정되려면 국회에서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상임위별 예비심사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본심사를 거쳐 본회의 의결까지를 무사히 마쳐야 한다. 가을철 예산전쟁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게 되는 셈이다.
예산전쟁의 최전방
의원들이 국회 예산전쟁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예결특위에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다. 예결특위는 전체 299명의 의원 가운데 50명 이내로 구성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올해는 전체 의석분포에 따라 한나라당 29명, 민주당 15명, 비교섭단체 6명으로 구성됐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개는 지역별로 안배한다. 국가 전체예산을 다루는 일 외에도 지역구 관련 예산을 챙기라는 묵시적인 배려가 작용한 결과다.
이 때문에 ‘지역이기주의’ 논란이 매년 되풀이된다. 예결특위 위원들이 나라 전체의 살림살이보다는 자기 지역에 필요한 예산만 따가려 한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지역구 의원 입장에서는 그런 비판이 오히려 선거구에서는 ‘훈장’이 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지역 예산을 따내기 위해 매달린다. 가령 전체 규모가 정해진 SOC 예산은 지역별로 보면 어차피 한쪽이 이득을 볼 경우 다른 쪽은 상대적인 손해를 입는 ‘제로 섬’인 만큼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특히 예결특위 안에 구성되는 계수조정소위원회는 예산전쟁의 최전방이다. 계수조정소위는 예결특위 중에서도 막판에 세부 내역을 조정하는 활동을 한다. 통상적으로 예결특위 위원장과 여야 정당 간사를 포함해서 10여 명으로 구성된다. 계수조정소위의 위원들 역시 지역별로 할당되는 것이 관례다. 따라서 소위 위원으로 선정되면 해당지역의 모든 예산을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되지만 예결특위 위원들은 소위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나라 살림살이를 짜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조율에 나서는 묘미가 있는데다, 적어도 자신의 지역구 예산만큼은 확실하게 챙길 수 있는 메리트가 생기는 까닭이다. 매년 계수조정이 이뤄지고 나면 뒷말이 무성한데, 대부분 소위 위원들이 밀실타협을 통해 해당 지역 예산을 나눠먹기 했다는 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계수조정소위에는 막판에 정권 실세나 야당 실력자들의 청탁이 줄을 잇는다. 굳이 지역현안 사업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사업들이 반영되도록 수시로 소위 위원들에게 연락을 취해 확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문을 꼭꼭 닫아놓고 심사를 벌이는 계수조정소위 회의장에는 수시로 쪽지가 들어가고 위원들이 슬며시 밖으로 나와 어딘가로 전화를 하면서 열심히 메모를 하는 장면이 낯설지 않다.
정부 예산안 편성과정은 물론이고, 국회의 예산안 심사에서도 정권이 탄생한 지역에 국고지원분이 많이 배정되는 것도 해마다 논란이 된다. 민주당(열린우리당) 정권인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호남이 영원히 먹고살 대형 국책 프로젝트에 대못질을 하는 예산이 편성됐다”는 불만이 영남에서 제기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 첫 예산편성이 이뤄진 지난해에는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을 겨냥해 ‘형님 예산’ 논란이 일었고, 올해도 벌써 비슷한 시비가 벌어질 조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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