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과 베트남은 1979년에도 전쟁을 했지요.
“조선뿐 아니라 고려, 신라, 고구려도 중국을 향해 칭신(稱臣)을 했습니다. 연개소문이 당 태종과 싸울 때도 외교문서에서 스스로를 ‘신(臣)’이라고 했죠. 우리는 중국에 거스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워싱턴이 그 점을 잘 아는 겁니다. 중국이 더욱 강해져 동아시아를 뒤덮을 때 한국은 중국에 끌려들어간다, 하지만 베트남은 절대로 안 끌려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역사는 무시하지 못합니다. 경로(經路) 종속적이에요. 우리와 베트남은 걸어온 길이 다릅니다. 미국이 중국과 관련해 베트남을 신뢰하는 데는 이렇듯 근거가 있습니다.”
약한 민족의 피해의식
▼ 지난해 한국과 중국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습니다. 사회·경제·안보에 큰 영향력을 미칠 일대 사건입니다. 중국의 대학교수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중국 쪽 협상 팀에 조공(朝貢)무역을 전공한 역사학자도 포함됐다고 합니다. 반면 한국은 행정 실무 관료와 경제 전문가만 참여했고요. 한중 FTA가 대한민국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봅니까.
“흥미로운 대목을 지적했습니다. 중국인은 역사적 맥락에서 현재의 일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중국 문명은 고대 문명 중 전통이 단절되지 않은 유일한 사례예요. 한자로 이어진 상나라 갑골문자를 아직도 사용합니다. 2500년 전 공자 맹자 순자 노자 한비자를 지금껏 우리가 읽습니다. 중국인은 이 같은 고대 문명을 이어받은 데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처럼 논리적인 역사서를 펴낸 고대 문명은 없어요. 본기와 열전을 결합한 기전체는 지금도 훌륭한 역사서 양식이죠.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남송이 몽골에 멸망당할 때 수도를 지키던 태수가 몽골군이 몰려오자 성문을 열면서 ‘나라는 망해도 괜찮지만, 역사서는 불타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역사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 겁니다. 동북공정, 동서공정 같은 것도 중국의 전통에서 비롯한 거예요. 그러니 베이징의 전략가들이 한중관계가 역사적으로 어땠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얼마 전 중국의 유력 기관 책임자가 공식석상에서 중국과 다른 나라의 관계는 역사적 고려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중심의 조공외교가 존재했으니 국제 교섭 때 그것을 반영해 중국이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힘을 가졌으니 힘을 쓰겠다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미국은 힘을 사용하면서도 ‘호혜’라고 표현하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요.”
▼ 삼성은 한국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기업집단입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중국 시안에 한국 기업 사상 최대 규모인 75억 달러를 투자해 첨단 반도체 공장 등을 지었습니다. 다른 대기업의 대(對)중국 투자 또한 늘고 있습니다.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려 존재합니다. 세계성의 시대예요. 글로벌 기업이 이익을 찾고자 큰 시장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크라이슬러가 독일에 넘어가고 소니가 미국의 유명한 건물을 구입해도 미국인은 뭐라 하지 않습니다. 일각에선 중국인들이 제주도 땅을 사는 것을 문제 삼던데, 그들도 돈 주고 사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약한 민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피해의식 비슷한 것을 가졌습니다. 기업은 좋은 제품을 가장 싼 가격에 공급해야 합니다. 따라서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공장을 짓는 게 유리하죠. 중국 투자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막을 수도 없습니다.
삼성전자를 예로 들면 주주 구성은 물론이고 생산시설이나 매출 등도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로 아주 낮습니다. 로컬 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회사예요. 이런 현실에서 한국 기업은 영원히 한국인, 한국 법(法)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국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비현실적입니다.
다만 마음이 어두운 것은, 북한이 개성공단의 우리 기업들을 볼모로 여기듯 하는 것처럼 향후 중국 정부가 한국 기업의 목을 조를 수단을 갖게 돼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중국이 재산권이 완전히 보장된 사회가 아니라는 점도 찜찜하고요.”
우리가 중국에 힘 쓰려면…
▼ 2009년 12월, 일본 집권 민주당 간사장이던 오자와 이치로 씨가 140여 명의 의원, 경제사절단과 함께 중국을 방문하면서 중일관계가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듬해 희토류 분쟁 등이 발생하면서 일본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낮추기 시작해 이후 인도, 아세안 등과의 협력을 대폭 확대해가고 있습니다. 일본이 리밸런싱(rebalancing)에 나선 듯한 양상이에요. 반면 한국은 대중 무역 의존도가 수출에서 26%를 넘어섰고, 한중 무역 규모는 한미·한일 무역을 합한 것보다 큽니다. 이 같은 경향은 한중 FTA로 인해 더욱 심화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우리와 일본은 사정이 다릅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10배가량 큰 나라예요. 중국을 하나의 옵션으로 여길 수 있지만 우리는 작은 나라라 옵션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은 시장이 작은 데다 노동조합 탓에 기업을 하기가 어려운 나라입니다. 삼성이 뭘 한다고 하면 무조건 막고 나서는 세력이 존재합니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삼성전자 공장을 경기도에 유치하려 애쓰다 포기한 것으로 압니다. 글로벌 회사는 민족주의, 애국심 따지면 안 됩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