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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헤이룽장성

黑 검은 용이 휘도는 白山黑水의 땅

  • 글 · 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黑 검은 용이 휘도는 白山黑水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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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를 휘감는 龍

프랑스 작가 아멜리 노통브는 소설 ‘공격(Attentat)’에서 “‘아무르’는 프랑스어로 ‘사랑’을 뜻한다”며, 아무르 강을 ‘사랑의 강’으로 해석한다.

“강과 사랑의 닮은 점 중에 가장 놀라운 건, 결코 마르지 않는다는 점이야. 가뭄이 들면 얕아지고 심하면 없어져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하지만 강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 옛사람들이 왜 강을 신으로 섬겼는지 알 만하지.”

감수성이 남다른 노통브답게 매우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만, 실제와는 동떨어진 해석이다. 아무르는 ‘큰 강’ 또는 ‘검은 물’이란 뜻의 퉁구스어에서 나온 이름으로 추정된다.

추운 북방, 산은 항상 눈에 덮여 있어 희고, 차디찬 강은 검푸르다. 백산흑수(白山黑水). 만주 남쪽의 백두산과 북쪽 흑룡강은 동북의 자연환경을 상징한다. 중국인은 찬탄한다.

“흰 산이여, 높고도 높구나! 검푸른 강이여, 흐르고 또 흐르는구나!(白山兮高高,黑水兮滔滔)”



대흥안령과 소흥안령이 둘러쳐진 헤이룽장성에는 헤이룽강, 쑹화강, 우수리강이 흐르며 비옥한 토지를 만든다. 나선정벌에 참가했던 조선 무장 신류도 헤이룽장의 흑토 대지에 감탄했다.

“이달 6월은 지난 5월보다 가뭄이 더 심했다. 그런데도 밀, 보리, 수수, 조 등 밭곡식이 말라 죽지 않는다. 이곳 땅이 얼마나 기름진지 알 만하다.”

흑수(黑水)가 흑토(黑土)를 적셔주는 흑색의 헤이룽장은 황하(黃河)와 황토(黃土)가 어우러지는 황색의 중원과 색채부터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중원과 이질적인 이곳에는 누가 살았을까. 중국 사서는 만주의 북부에 살던 이들을 ‘숙신(肅愼)’이라고 기록한다. 숙신계는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등 쟁쟁한 종족을 포괄한다. 남부의 예맥계(고조선·고구려), 서부의 동호계(거란·몽골)와 팽팽하게 겨루던 세력이다.

그러나 숙신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헤이룽장에는 다우르족, 허저족, 오로첸족, 에벤키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산다. 중국의 소수민족 분류는 엄밀한 문화인류학적 분류라기보다 행정관리를 위한 편의적 분류의 성격이 강한데도, 이처럼 여러 집단으로 나눈 것은 동북방 일대 민족들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부족마다 성격이 상당히 다르고 독립성 역시 더욱 강했을 것이다. 그러니 ‘숙신’이란 말은 ‘북만주 일대에 살던 온갖 사람들과 세력들’을 통칭한다고 생각하자.



다우르, 허저, 오로첸, 에벤키族

黑 검은 용이 휘도는 白山黑水의 땅

고구려 불교예술의 영향을 받은 발해 석등(渤海 石燈) 복제품(헤이룽장 박물관)

삼림이 빽빽한 추운 북방의 산에 살던 이들은 생존을 위해 농사·채집·수렵·어로·목축 등 매우 다양한 활동을 했다. 만주 삼림의 유목민은 몽골 고원의 유목민과도 크게 달랐다. 몽골 유목민이 소·양·말을 키우며 초원의 풀을 뜯게 했다면, 만주의 에벤키족은 순록을 키우며 삼림의 리트머스 이끼를 먹게 했다.

헤이룽장 모허 출신 작가 츠쯔젠(遲子建)의 소설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에서 에벤키족의 순록 예찬을 들어보자.

“순록은 머리는 말을 닮았고, 사슴처럼 생긴 뿔, 나귀 같은 몸집에 발굽은 소와 비슷하다. 말과 흡사하지만 말이 아니고, 사슴과도 비슷하지만 사슴이 아니고, 나귀와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나귀도 아니고, 소 같기도 하지만 소도 아니었다. 한족은 이러한 모습을 두고 ‘사불상(四不像)’이라고 불렀다. 순록은 말머리처럼 위풍당당하고, 사슴의 뿔처럼 아름답고, 나귀의 몸처럼 건강하고, 소발굽처럼 강인하다.”

숙신의 용맹함과 뛰어난 궁술은 멀고 먼 중원까지 알려졌다. 공자는 새에 꽂힌 정체불명의 화살을 보고 숙신의 화살임을 알아맞혔고, 진수도 ‘삼국지 동이전’에서 숙신의 후예인 읍루(挹婁) 사람들은 대부분 용감하고 힘이 세며 활쏘기에 뛰어나다고 했다.

숙신 땅은 부여보다 훨씬 춥고, 인구는 적고,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진수는 읍루에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마을마다 대인(大人)이 있다”고 했다. 즉, 통일된 지도자가 없고 마을 단위로 족장이 있을 뿐이었다. 국가체제를 정비하지 못하고 군소 부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다. 훗날 부여와 고구려가 헤이룽장까지 영향력을 미치기는 했지만, 헤이룽장을 중심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헤이룽장을 중심으로 삼은 첫 국가는 발해다. 고구려 멸망 후 만주는 당·돌궐·신라의 세력이 미치지 못해 힘의 공백지대가 됐다. 698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해 요동에서 탈출한 후 지린성 둔화시 동모산에 이르러 발해를 건국했다. ‘동북의 왕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은 만주 일대의 호응을 얻었다. 727년 무왕은 성공리에 주변 세력을 통합했음을 일본에 알렸다.
“열국(列國)을 주관하고 제번(諸蕃)을 거느려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잇게 되었다.”

발해는 흑수말갈·당·신라의 도전을 물리치고 동북의 새로운 주인으로 자리를 굳혔다.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안정되자 발해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제도를 정비해 내실을 다졌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756년 문왕은 상경용천부(헤이룽장 닝안현)로 천도했다. 안록산은 3개 절도사를 겸해 허베이·랴오닝·산시(山西)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발해는 안록산의 습격을 우려해 방어에 더 유리한 상경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상경용천부는 넓은 평야지대에 무단강(牡丹江)과 징푸호(鏡泊湖)를 끼고 있다. 무단강은 쑹화강 최대 지류이고, 징푸호는 95㎢ 면적에 오늘날에도 40종의 물고기가 사는 천연 저수지다. 이처럼 상경용천부는 강·호수·산으로 둘러싸여 농어업과 방어에 유리했다.

마침 8세기는 지구적 온난기여서 추운 만주에서도 농경·목축 여건이 좋아졌다. 안록산의 난 이후 기운이 크게 쇠퇴한 당나라는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대내외적 호재가 겹쳐 발해는 ‘동방의 풍요로운 나라(海東盛國)’가 되었다. 발해 영토는 고구려의 두 배에 달했고, 상경용천부는 당시 아시아에서 당나라 장안성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상경용천부의 둘레는 16km. 600년 뒤에 세워진 조선 한양(둘레 18km)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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