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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崔·朴의 그림자

“박근혜 정부가 사찰, 쥐도 새도 모르게 나도 당할 수 있다”

이영도 前 숭모회 회장

  • 이혜민 | 동아일보 출판국 디지털미디어팀 기자 behappy@donga.com

“박근혜 정부가 사찰, 쥐도 새도 모르게 나도 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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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민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90년 육영재단 분규 때다. 숭모회라는 단체가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을 주장할 때 최태민의 전횡이 문제로 떠올랐다. 최태민의 실체에 대한 각종 유언비어가 가장 많이 드러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숭모회 측이 발행한 유인물에 따르면 최태민의 이름은 7개이고, 자유당 시절 경기도 경찰국 사찰주임을 지냈으며, 유가증권 위조로 경찰에 기소된 적이 있고, 몸에 흰 피가 흐르는 영험한 목사로 떠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또 숭모회가 주장했던 최태민의 전횡이란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최태민이 어린이회관 구내에 있는 근화교회 목사로 일하면서 실권을 휘둘러왔고, 눈에 거슬리면 직원들을 해고했다.’ ‘폐간된 어깨동무, 꿈나라 등의 편집에 자신의 딸이 관여하게 했고, 육영이 목적인 어린이회관을 수익사업체로 전환시키려 했다.’ ‘87년 어린이회관 직원들이 노조를 결성하려고 했을 때 뒤에서 공작을 꾸며 이를 저지했다.’ ‘최씨의 OK 결재가 나야 박근혜 이사장에게 결재가 올라간다’ ‘근화봉사단을 발족시킬 때 조직에 깊숙이 개입, 박 대통령 기념관 건립 계획 등 각종 사업을 배후 조종해왔다.’ (…) 이 같은 비리 혐의는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고 부풀려져 유포됐다.
- ‘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2005) 171쪽



▼ 숭모회를 만든 뒤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은 언제 만났나.



“궐기대회 3일 뒤인 11월 1일 만났다. ‘내가 기고한 시를 봤느냐, 시의 의미를 아느냐’고 물으니 ‘모두 안다’더라.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근령이에게 재단 이사장 자리를 주겠다’고 하더라. 11월 3일 박근혜를 또 만났다. 내가 배석자들을 다 내보내고 독대를 했지만 어디에선가 녹음되고 있을지 몰라 박근혜에게 몰래 쪽지를 건넸다. 최종 목적은 박근혜 구출이었으니까. 우리는 쪽지에 쓰인 대로 구출을 시도했는데 박근혜가 응답하지 않았다. 이후 박근령 비판 기사가 나왔고, 11월 9일 우리는 그 내용을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때부터 언론의 흐름이 ‘최태민 비판’으로 가더라.”

▼ 당시 박근령, 박지만 남매는 어떤 역할을 했나.

“두 사람 모두 힘이 없었다. 물론, 숭모회도 허상이었다. 하지만 명분이 있었다. 박근혜는 언론에 ‘동생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밝혔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 작전은 어떻게 짰나.

“박근혜와 박근령이 같이 나오는 사진을 찍고 ‘육영재단 이사장 이취임식’이라고 언론에 내면 그만이었다. 14일 밤 박근령에게 ‘언니에게 스피커폰 통화를 하라’고 시켰다. 박근령이 ‘재단 이사장 이취임식 하자’고 하니까 박근혜가 앙칼지게 ‘알았어! 와!’ 하더라. 박근령이 ‘사람들이 나를 못 들어가게 할 거다’ 하자 ‘같이 들어가줄게! (오전) 9시 50분까지 정문으로 와!’ 하더라. 난 어린이회관 직원 26명과 밤을 새우며 작전모의를 했다.”



“가장 비련한 여인은 박근혜”

“박근혜 정부가 사찰,  쥐도 새도 모르게 나도 당할 수 있다”

1990년 11월 7일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이 기자간담회에서 사임의사를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

▼ 9시 50분에 두 영애가 만났나.

“아니다. 박근혜가 9시 20분 어린이회관으로 와서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박근령은 9시 5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박근령이 지레 겁먹을까봐 작전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는데,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다. 박근령이 몇 시에 왔는 줄 아나. 10시 16분에 왔다. 약속보다 자그마치 26분 늦게. 마침내 두 사람의 이취임식 사진을 찍었다. 박근령은 울면서 나갔고 난 그날 10시 30분에 떠났다. 사람들이 내가 사욕을 위해 일을 벌인 줄 아니까 이곳에 머무르면 창피해지겠더라. 이 일로 돈 한 푼 안 받았다. 그렇다고 손해를 본 건 아니다. 태어나서 내 머리를 온전히 다 써볼 기회가 흔한가.”

▼ 박근령 씨는 왜 늦게 왔나.

“미용실에서 머리 했단다, 머리.”

▼ 박근령 씨와는 언제 다시 만났나.

“1991년 11월 중순 내 생일쯤 만났다. 시계를 사가지고 왔더라. 이듬해 박근령 쪽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임기를 1년 채 안 남기고 취임한 박근령은 연임이 어려운 상태였다. 이사진(전체 8명) 대부분이 박근혜 편이었다. 내가 이사 6명의 사임서를 받아냄으로써 박근령 이사장이 장기 집권할 토양을 만들어줬다.”

▼ 박근령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은 건 없나.

“그때 난 신용불량자로 봉급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박근령이 몇 번 책 안에 100만~150만 원을 끼워서 줬다. 난 나중에 그걸 100배로 갚았다. 박근령과 함께 일한 기간은 2년이 채 안 된다. 1994년 6월 30일 육영재단을 떠났다. 육영재단 일을 도울 때 국토순례단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국토순례는 어린이·청소년에게 호연지기를 기르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육영재단을 나와서도 2005년까지 이 일은 계속했다.”

▼ 육영재단에서는 왜 나왔나.

“정치세력과 부딪치니까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육영재단의 노조 설립을 막으며 ‘재단을 개선하겠다’고 설득했지만 1년 뒤에도 나아지지 않으니까 면이 안 서더라. 그래서 떠났다. 그 뒤에도 최태민 일가가 재단을 점령하려고 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 전략으로 결국 박근령이 몰락의 길을 걷었다.”

▼ 당신을 ‘박근령의 최태민’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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